[김관선 목사의 시편] 동행

입력 2012-06-12 18:03


요즘 대형마트들의 휴점이 강제되고 있습니다. 상생이라는 이상을 향해 동네 가게이나 재래시장이 숨 쉬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지만 뾰족한 해결방안이 좀처럼 나오지 않고 그 벌어진 틈은 마치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각각 죽어서 간 곳의 간격처럼 좁히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건전한 사고와 가치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양극화 사회에서 더욱 가슴 답답한 것은 교회의 양극화입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법적 조치도 힘듭니다. 강제할 방법도 없습니다. 화려하고 큰 교회와 초라하고 작은 교회의 양극화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성장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큰 교회는 더욱 커지고 작은 교회는 존립자체를 위협받는 형편을 자유경쟁이니 능력의 문제니 하는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슴과 눈으로 이 현실을 읽고 느끼고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목격하는 것은, 매년 농어촌 목회자 위로회를 할 때마다 그들의 눈에 맺힌 눈물과 탄식이며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힘들다는 것으로 인한 좌절감입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 서울로 초청하기도 하고 찾아가서 직접 농사일도 거들고 집도 짓고 땅도 사고, 또 그 곳 어린이들과 연합 수련회나 성경학교를 하는 등의 몸부림이 해보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가 이제는 동행이라는 큰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내 것, 내 교회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저런 도움을 주거나 또 찾아가고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키우고 모으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지 말고 나누고 보내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요, 부흥임에 눈떠야 합니다. 곁에 있는 작은 교회를 배려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할 때 진정한 동행이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의 삶에 들어오셨고 동행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동행은 높고 힘 있는 편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 같이 화려한 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라도 손잡기 편안한 외모였습니다. 내게 왜 힘을 주시고 또 왜 높이셨는지 생각하여 함께 하기 어려운 상대의 곁을 지켜주는 것은 참된 행복을 경함하게 할 것입니다. 주차장 등 편리한 시설이 부족해도 교회와 성도들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게 할입니다. 이것은 이미 임상실험을 통해 입증된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는 우리 성도들이 증인입니다.

<산정현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