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청교도 혁명 이상을 시로 구현한 잃어 버린 낙원의 시인 존 밀턴 (下)
입력 2012-06-11 18:07
理想으로 생각한 공화정 무너지자 ‘낙원상실’ 주제로 서사시 써
존 밀턴은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던 1654년 ‘영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호’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종교적 자유, 가정적 자유, 정치적 자유였다. 그는 종교적 자유를 위해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 등 종교개혁적 팸플릿을, 가정적 자유를 위해서는 ‘이혼론’을, 정치적 자유를 위해서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썼다.
크롬웰 공화국 정부는 논객으로서의 밀턴에 주목했다. 밀턴은 찰스 1세가 처형된 지 2주 후에 ‘국왕과 관료들의 재직 조건’이라는 팸플릿을 출간했다. 이 팸플릿은 왕의 처형을 정당화하고 있다. 밀턴은 왕이 백성을 섬기지 않고, 부패한 성직자와 아첨꾼들의 말을 듣기 시작하면 폭군이 되기 쉽다고 주장했다. 그럴 경우 백성들은 왕을 재판할 권리가 있으며 필요하다면 처형할 수도 있다. 왕과 관료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다스리도록 선택한 백성의 합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의 권위는 백성의 합의로 이루어진 법의 권위에서 나오며, 왕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 왕과 관료는 이 법에 따라 할 일을 바르게 수행해야 한다.
크롬웰 정부는 신생 공화국의 정당성을 유럽 여러 나라에 선전할 입이 필요했다. 밀턴은 1649년 3월 1일 외국어 담당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외교문서 번역, 외국 사신과의 공식회견 통역과 대외적인 선전의 일을 맡았다. 공화국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찰스 1세의 처형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는 처형당한 왕에 대한 동정적인 분위기를 깨기 위해 ‘왕의 성상’를 비판하는 ‘우상파괴자’를 썼다. 그러나 동정적인 분위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프랑스의 저명한 프로테스탄트 논객 살마시우스가 ‘왕의 옹호’를 써서 찰스 1세를 처형한 것을 다시 비난하고 나섰다. 이 책은 신생 공화국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유럽 대륙과의 관계도 위험에 빠뜨렸다. 밀턴은 신생 공화국을 또 다시 변호해야 했다. 1651년 2월 24일 그는 전 유럽을 상대로 ‘영국민을 위한 변호’를 라틴어로 출간했다. 정의를 판정하는 것은 국민이며 이 기본원칙에 따라 국왕 처형은 합법이라고 주장했다. 살마시우스에 대한 이 반박문은 밀턴에게 영국 공화국 옹호자로서의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밀턴은 논객으로서 공화국 혁명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각국의 비난과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분주했다. 너무나 일에 몰두한 나머지, 실명할 위기에 처했다. 가뜩이나 나쁜 눈이 엄청나게 몰려드는 글을 읽고 이에 대응하는 글을 쓰느라 더욱 혹사당한 것이었다. 1648년에 완전히 실명했던 왼쪽 눈 때문에 오른쪽 눈에 의지해 일을 해나갔다. 그러나 오른쪽 눈의 시력도 1652년 2월에 가서는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43세가 되던 해에 밀턴은 완전히 실명했다.
완전히 실명했지만 밀턴은 공화국을 변호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는 조수를 고용해 받아쓰게 한 다음, 1654년 ‘영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호’를 발표했다. 이것은 익명으로 발표된 ‘영국 국왕 살해에 대해 왕의 피가 하늘에 부르짖는 호소’라는 책자를 공격하는 글이었다. 이 글에는 자신의 실명에 대한 변호와 함께 자전적인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글을 쓸 때 밀턴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아내 메리 파웰은 내전이 끝나자 1645년 밀턴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밀턴에게서 막내딸 데보라를 낳은 직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한 달 후 외아들 존마저 죽었다. 그는 1656년 20세 연하의 캐서린 우드콕과 재혼했으나, 그녀도 결혼한 지 1년 남짓 후 사망했다. 그녀가 낳은 딸도 죽었다. 밀턴은 실명과 더불어 연이어 아내와 자식들을 잃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말라리아에 걸려 런던의 화이트홀에서 59세의 나이로 숨진 것이었다. 크롬웰이 죽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무능했다. 공화정의 무능함과 청교도적 통제에 염증을 느낀 영국 국민은 왕세자 찰스 2세의 귀국을 환영했다. 이제 왕정 복고는 시간문제였다. 밀턴은 목숨을 걸고 왕정 복고를 저지했다. 그는 군주제의 속박을 비판하는 ‘자유공화국 수립을 위한 준비되고 쉬운 길’을 발표했다. 그러나 1660년 5월 찰스 2세가 열광적인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도착했다.
밀턴이 이상적 국가로 생각했던 공화정은 무너졌다. 무덤에서 파낸 크롬웰의 사체가 타이번의 교수대에 매달렸다. 밀턴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친구 집에 은신하던 밀턴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밀턴은 처형당하지 않고 몇 달 만에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다. 새 정부는 실명 시인을 처형하기보다 은혜를 베푸는 것이 민심 수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저서 ‘우상타파론’과 ‘영국민을 위한 변호’를 분서하는 것으로 형벌은 일단락되었다. 석방된 후, 밀턴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삶을 되새기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실패와 고통은 밀턴에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했다. 그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살았던 경험을 담아 그 유명한 ‘실낙원’을 썼다. 그는 ‘실낙원’에서 이렇게 노래하리라 말한다.
“보다 편안한 목소리로 나는 노래하리라/ 악운의 날 만나도 목쉬거나 그치는 일 없이/ 비록 악한 세월과 사나운 혀를 만나고/ 어둠 속에 위험과 고독에 에워싸이더라도”
‘실낙원’은 1665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페스트 발발과 뒤이은 런던 대화재로 인해 출판할 수 없었다. 10편으로 된 무운시 형식의 ‘실낙원’은 1667년에 출판되었다. ‘실낙원’은 상식을 뛰어넘는 문장들과 난해한 어휘, 우아한 문체로 읽기 쉽지 않았지만, 1년 반 만에 초판 1300권이 모두 다 팔렸다. ‘실낙원’은 1674년 밀턴이 사망하기 전 12편으로 재구성되어 다시 출판되었다. ‘실낙원’은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반역과 아담과 이브로 대표되는 인간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낙원 상실이라는 주제를 다룬 서사시였다. 그것은 그가 그렸던 이상적 정치체제의 실종을 은유한 것이었다.
밀턴은 ‘실낙원’을 처음 출판한 지 4년 후인 1671년 ‘복낙원’을 출판했다. 같은 해에 밀턴은 고대 희랍 비극을 빌려 ‘투사 삼손’을 써서 ‘복낙원’과 함께 출간했다. ‘복낙원’은 광야의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4편짜리 서사시이다. ‘투사 삼손’은 삼손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를 인정하고 유혹에 빠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영웅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삼손은 밀턴의 모습이기도 했다. 삼손처럼 밀턴도 실명했다. 삼손처럼 밀턴도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던 자기 자신과의 투쟁에 끝내 이겨 명예와 자유를 되찾았다. 밀턴은 삼손과 같은 영웅적 행동을 할 때 잃어버린 낙원, 자유와 정의가 가득한 세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밀턴은 죽기 전에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담은 참된 종교에 관한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우선 종교 자유를 역설한다. 또한 로마 가톨릭의 확대를 막아야 하며, 영국민은 의무로서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밀턴은 1674년 11월 8일 일요일 밤에 격한 통풍으로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런던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 묻혔다.
밀턴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위대한 영국 시인으로 칭송된다. 그리고 그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옹호한 언론인이자 사상가로 추앙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양심적인 청교도로서 시민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운 투사로 기억될 것이다. 월리엄 워즈워스는 ‘런던’이라는 시에서 밀턴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밀턴이여! 그대 이 순간 살아 있어야 하오/ 영국이 그대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이 나라는/ 지금 물이 괴어 있는 늪, 제단도, 칼도, 펜도/ 난로가도, 홀도, 규방의 당당한 부도/ 그들의 오랜 영국의 유산인 내면의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소.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사람들/ 오! 우리를 일으켜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시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