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그대, 자아교환을 경험하였는가
입력 2012-06-11 18:06
우리는 십자가를 흔히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물론 그렇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용서 되고 구원 받는 곳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아사셀 어린 양으로 오셔서 버림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이 정도로만 이해를 하거나 오늘날 교회와 교계가 어려운 문제 속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십자가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는 곳만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성이 죽고 옛 사람의 욕망이 죽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그냥 죄 용서와 구원만 경험하니까 죄의 욕망과 옛 사람의 탐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모여서 서로의 욕망과 욕망을 맞대니까 각종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욕망이 아닌 것처럼 믿음의 탈을 쓰거나 선과 도덕, 정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욕망이 어떻게든지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려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정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라던 명예와 교권을 잡으려한다. 겉으로는 정의감과 믿음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욕망을 성취하려는 탐욕과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자아교환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에서 자아를 깨트리거나 변화시킨다고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을 치고 겉만 변화시키는 것이지 실제로 죽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죽는 것은 십자가에서 자아교환을 하는 것이다. 그 자아교환은 십자가에서 먼저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폐기처분되고 내 안에서 주님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삶의 주인과 왕이 되시는 것이다. 즉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는 것이다(갈2:20). 이것이 진짜 자기 죽음을 통한 자아교환 사건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주님의 은혜로 살고 선악 판단이 아니라 말씀이 기준이 되고 주님의 생명과 감동이 삶의 동력이 된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방에게 화살을 쏘고 공격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주님의 몸인 교회까지 흔들고 교계까지 몸살을 앓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를 통한 자아교환을 이룬 사람은 먼저 주님 체면을 생각하고 그 영광을 생각한다. 아무리 불이익과 손해를 본 것 같아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누가 된다면 언제든지 양보하고 물러날 수 있다. 내 욕망으로 인해서 교회의 이미지가 추락하고 주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는다면 먼저 양보하고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가 아무리 영광스러운 자리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대는 과연 십자가를 통한 자아교환을 경험했는가. 주님이 정말 그대 안에서 왕이 되시고 삶의 동력이 되고 있는가. 그런데도 당신의 교회는 혼란 속에 있지는 않는가. 왜 한국교회는 여전히 진정한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가.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