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말복] ‘꼬레 댄서’ 최승희

입력 2012-06-11 18:38


“세계를 제패한 글로벌 한국인의 전형… 21세기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방안 찾자”

해마다 유월이면 내 머릿속에 장미와 6·25전쟁이 떠오른다. 이들이 연상작용을 일으키면 동족간의 이념전쟁에 휩싸인 장미가 되고 그것은 나에게 최승희(1911∼1969)라는 인물로 그려진다. 최승희는 우리나라가 배출한 가장 세계적인 예술가이자 동양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수로 평가받는다.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유럽과 미국, 중남미 등에서 150여회의 공연을 한 최승희는 당시 프랑스의 대표 일간지 ‘피가로’로부터 “선이 매우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용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동양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명성을 얻었다. 일본 강점기에 그녀는 ‘꼬레 댄서’로 세계에 알려졌다. 1939년 파리 공연의 전단지에서 그녀는 ‘조선이 낳은 천사 같은 무용수’라 불렸다.

최승희는 1926년 우리나라에서 현대무용을 처음 공연한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을 하며 일본 최고의 무용수가 되었다. 이시이 문하에서 현대 춤과 발레를 배웠지만 1934년 도쿄에서 개최한 제1회 발표회부터 한국 춤 레퍼토리로 구성해 호평을 받으며 일본 순회공연을 하면서 일본 제일의 무용가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의 전통적 주제와 소재에 서양식 기법을 가미해 풍부하고 스펙터클한 무대공연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장했다. 이후 일본과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제일의 무용수’ ‘동양 제일의 무용수’ ‘세계적인 한국의 무용가’로 성장한 최승희는 평균 신장이 특히 작았던 일본 무용수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1935년부터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대단한 성공과 인기를 누린 최승희는 ‘동양의 천사 같은 무용수’라 불릴 정도로 서구적 미인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그녀는 화장품, 콜롬비아 축음기, 초콜릿 등 다양한 제품의 광고 모델로 활약했고 여러 편의 영화 출연과 레코드 취입을 하였다.

최승희는 일본 유학을 떠날 때부터 이미 신문화의 기수였고 일본에서의 성공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본 사람을 이긴 쾌감과 감격을 맛보게 해 준 위안’이었다. 식민지 시절 그녀는 조선인의 희망이자 긍지였으며 민족적 자긍심을 채워주는 민족의 꽃이었고 빛이었다. 당시 손기정과 함께 그녀는 조선의 자랑스러운 아들과 딸이었다.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최승희는 친일파라는 주위 시선과 이미 월북한 남편 안막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갔다. 김일성의 환대 속에 그녀는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북한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북한과 조선무용의 프로퍼갠더 역할을 했다. 6·25전쟁 당시 김일성은 최승희를 남측에 뺏기지 않도록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초청으로 중국에 피신시켰다. 이후 북한에서 최승희는 조선무용의 기본을 정리해 ‘조선민족무용기본’을 출판하는데, 이는 한국 춤에 기초한 동양 발레를 꿈꾼 그녀의 업적이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이 1958년 숙청된데 이어 1967년 숙청당했다.

남한에서 그녀의 예술적 업적은 ‘친일파’와 ‘월북’이라는 꼬리표로 인해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히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이념논쟁에 휩쓸려 그녀의 예술적 가치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점은 안타깝다. 예술세계에서의 평가는 직관적이고 예민해 사상적 이유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제 20세기 이념논쟁의 시기는 지나고 21세기 문화전쟁의 시대에 돌입하였다. 선진국들이 창의성 교육을 중시하여 무용을 포함한 예술교과를 필수교과로 선정하고 있는 이때 그녀의 창조적 업적을 우리의 것으로 본받아 배워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도 한국 무용계와 예술계는 그녀의 국제적 명성과 위상에 버금갈 만한 스타를 배출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 아름다운 유월에 많은 사람들이 나라 잃은 1930년대에 이미 세계를 제패한 글로벌한 한국인 예술가가 있었음을 알고 자긍심을 느꼈으면 좋겠다. 최승희의 작품세계가 진지하게 재평가되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한국의 문화자산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김말복(이화여대 교수·무용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