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육군소장 조주태 장로 “선열들 피로 지킨 나라 종북세력에 흔들리게 해선 안돼”

입력 2012-06-08 18:16


“하나님께서 대한민국과 국민을 사랑하는 게 분명합니다. 북한 체제를 따르는 세력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들을 발본색원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최근 국내에 이념 논쟁이 활발히 일고 있는 가운데 구순을 앞둔 노병(老兵)이 자신의 소신을 또렷하게 밝혔다. 태평양전쟁과 6·25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온 몸으로 감당한 예비역 육군 소장 조주태(88) 장로. 현충일을 지낸 뒤 서울 연남동 자택에서 만난 조 장로는 노구에도 꼿꼿한 자세와 힘찬 목소리로 조국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밝혀나갔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인사들이 대놓고 궤변을 늘어놓는가 하면 이들이 국회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우리 국민들이 정말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조 장로는 꾸준히 매스컴을 통해 국내외 뉴스를 수집하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온 듯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안타까움과 걱정스러움을 차곡차곡 쟁여온 듯했다. 특히 일부 야당 국회의원의 북한을 편드는 듯한 언행, 위법과 편법으로 금배지를 단 몇몇 주사파 국회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이들이 백일하에 노출된 것은 우리나라와 국민들에게 기회일 수 있습니다. 올바른 국가관을 가진 정치권과 국민들이 힘을 합쳐 이들을 소탕하면 오히려 국방과 안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조 장로는 젊은 시절을 온통 전쟁터에서 보낸 진정한 역전의 용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서는 연로함 속에서도 언뜻언뜻 장수로서의 용맹성이 비쳤다. 일제 시대 일본군에 징집돼 태평양 전선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귀국한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뒤 소대장으로 한국전쟁에 나서 대대장까지 거치면서 숱한 전투를 치렀다. 이어 주월 백마부대 작전부사단장으로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는 세 번의 역사적인 전쟁에 나가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전선을 지켰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가진 이는 드물 겁니다. 그래서 조국에 대한 사랑을 누구보다 깊이 체득했습니다. 위험한 순간요? 말할 필요도 없죠. 죽을 고비를 수백 번도 넘게 넘겼습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아니었으면 벌써 저 세상으로 갔을 목숨입니다.”

조 장로는 자신의 인생을 파란만장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일제의 학도병으로 징집된데 이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며 젊은 시절을 온통 목숨을 내걸고 전장을 누볐다. 베트남전을 마친 뒤부터는 국군정신전력학교 국방대학원 등에서 국군의 정신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40여 년 동안 살아온 연남동의 아담한 그의 집 거실 벽에는 그가 조국을 위해 흘린 피땀에 대한 보상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화랑무공훈장(2회),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2회)에 보국훈장 광복장, 천수장 국선장….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우들의 생명이 희생되는 가운데서 살아남은 게 죄스러울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끌어주신 데에는 뭔가 뜻이 있을 것 같아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 중 1990년 자연스럽게 베트남선교협회가 만들어지고 초대 회장을 맡아 9년 동안 봉사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베트남 선교가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는 말이 아닌가. 실제로 조 장로는 베트남전 참전을 계기로 현지에 정통하게 된 점을 활용해 괄목할 만한 선교 업적을 쌓았다. 베트남에 106곳의 교회를 재건하고 아가페병원을 설립하는가 하면, 현지 신학교 건립과 목회자 양성 등으로 베트남 복음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무엇보다 ‘마른 물레방아에 물을 공급하자’는 그의 구호에 따라 이뤄진 베트남 선교는 크게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베트남선교협회 명예회장인 그는 아직도 베트남에 큰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 들어가 선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대주면서 현지인 목회자들을 양성해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했죠. 현지에서도 우리의 이 방법을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하면서 힘을 모아줬습니다.”

조 장로는 32년간의 군 생활뿐 아니라 예비역으로서도 다양한 삶을 살았다. 선교단체를 이끌기도 했고, 대한석탄공사 감사와 이사로 10여년 봉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서예가로서 문화예술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서 나라와 시국을 보는 시각도 있을 법했다.

“국가의 상황과 문제를 바라보는 데 군인과 민간인이 다를 수 없죠. 현재 시국이 6·25전쟁 직전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때도 좌익 세력이 극렬하게 활동하면서 나라가 많이 시끄러웠답니다. 이런 상황에 잘 대처하면 나라를 더 안정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지만 잘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크게 후퇴할 수 있어요. 국민들과 국가지도자들이 이를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향에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해 평생 신앙인으로 살아온 그는 현재 서울 대현동 신현교회 은퇴장로로서 지금도 주일이면 노구를 이끌고 교회로 가 예배를 드린다. 그는 전쟁터를 누비면서 누구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다는 걸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과 뜻은 하찮은 우리 인간들이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생각나는 건 절대자이신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임무를 다하고 살아남도록 해주신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온 힘을 바치겠다는 기도를 수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아 후회스럽기도 해요. 하지만 어쩝니까.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기대는 수밖에요.”

그의 고백은 역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면서 아직도 군인 특유의 솔직담백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평생 신앙인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성실함도 엿보였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선 너도 나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는 그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