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과 열정, 그 한시성에 대하여… 은희경 새 장편 ‘태연한 인생’

입력 2012-06-08 18:11


소설가 은희경(53)의 신작 장편 ‘태연한 인생’(창비)엔 미당 서정주의 시 ‘침향’의 한 구절이 인용돼 있다.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한 것도 없다.”(250쪽)

소설이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불현듯 만나게 되는 이 시구는 시종 연애와 문단 이야기로 채색되는 숨 가쁜 전개에 청량감을 던져준다. 옛 사람들이 참나무 토막을 수백 년 동안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담가놓고 만든다는 침향. 침향엔 대체 어떤 상상력과 허무의 스케일이 들어 있길래 옛 사람들은 천년 뒤에나 쓸 수 있는 향기를 만들었던 것일까.

‘태연한 인생’은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40대 후반의 소설가 요셉과 10년 전에 헤어진 애인 류. 소설은 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오래전 어느 봄날 한 남자가 대학교 버스정류장의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통화 중인 한 여자를 바라본 후, 남자는 여자에게 마술처럼 이끌린다. 남자는 졸업반인 여자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남자는 애인이 있다는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매달린 끝에 결혼을 하고 처가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난다. 비행기 안에서 여자는 앞으로 태어날 자식의 이름을 ‘류’라고 짓는데, 그건 ‘흐름’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왕자와 이국공주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오페라 ‘울지 마라, 류’에서 따왔다고 훗날 딸에게 들려준다.

한 사안에 대한 다른 해석은 그들의 성격이 반영된 것이다. 류의 어머니는 세상의 정돈된 이치에 따라 사는 여자였고 아버지는 매혹에 이끌려 사는 남자였다. 류의 전사(前史)에는 이처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있었다. 결국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류는 한국으로 돌아와 유부남인 요셉을 만나게 된다. 류가 한때 요셉을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기도 했다.

하지만 류는 요셉을 떠나가고 어머니가 들려준 자신의 작명 일화인 세상의 흐름 위에 몸을 싣는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소실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매혹과 열정의 시간이 끝나버리는 날 자신이 혼자 비행기에 실려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했다.”(263쪽)

요셉은 예술가적 자의식을 고수하며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퇴락한 작가이다. 그런 그에게 ‘위기의 작가들’을 테마로 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옛 제자 이안이 찾아온다. 이안은 영화를 통해 과거 요셉의 추문을 폭로하는 복수를 꾀하고 있다. 요셉은 이안의 위선적인 면모를 경멸하면서도 그를 통해 영화 제작자금을 지원하는 류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영화 출연을 결심한다. 요셉을 둘러싼 인물들 가운데 도발적인 여자 도경은 불쑥 다가와 이렇게 들려준다. “이안 감독이 키스는 했나봐. 딱 한 번 키스했는데 그걸 갖고 의심한다고.”(250쪽)

학창 시절에 요셉의 집을 찾아간 이안이 요셉 아내와 키스를 했다는 말을 뒤늦게 도경으로부터 전해들은 요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다 말고 예의 ‘침향’을 떠올리는 것이다. 열정이나 연애도 궁극적으로 외로움을 대가로 한다는 점에서 절대고독이라는 깊은 물에 잠겨 숙성되는 ‘침향’의 이미지는 소설의 격을 한 차원 끌어올린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