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18)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신화적 복원… 시인 손택수

입력 2012-06-08 18:11


시의 모티브는 고향을 향한 노스탤지어

인생은 흐려지지만 지울수 없는 수채화


전남 담양의 강쟁(江爭)마을은 영산강 지류인 죽녹천이 흐르고 삼인산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친 곳이다. 죽녹천에서 멱을 감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와 민요를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낸 손택수(42) 시인은 취학통지서가 나올 무렵, 고향을 등져야 했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사한 후 향수병을 심하게 앓았다. 학교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부산 집에 다니러 오면 그는 차부까지 따라가 옷자락을 붙잡고 “나 좀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고교 졸업 후 시각장애인들이 일하는 안마시술소에서 현관보이 겸 구두닦이를 했는데 그들에게 시를 읽어주며 본격적으로 시를 접하게 됐다. 한번은 구두를 닦고 있을 때 건달 한 명이 거들먹거리며 들어오더니 구두장 위에 놓인 책들을 보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짜슥아, 구두장이 책장이가? 구두닦이면 구두나 잘 닦을 노릇이지 책이 뭐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통수에 불똥이 튀었다. 건달의 주먹 한 방이 그의 흐릿한 의식을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부숴버린 것이다. 그는 짐을 꾸렸다. 언젠가 시인이 되면 점자로 된 시집을 들고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안마시술소에서의 한철은 가장 아름다운 그의 습작기였다.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중략)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범일동 블루스’ 부분)

손택수는 시란 유년의 장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덟 살 이전에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트라우마가 유년에서 출발한다. 전형적인 농경문화의 공간인 담양에서 살다가 옮겨온 부산 범일동의 거처는 한 지붕 아래 15가구, 부엌에 물이 안 빠지는 빈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고향에만 있었다면 잃어버린 유토피아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것에서 시를 작동시킨 게 그의 초기시라면 이제 그는 스스로 잃어버리고 놓아주는 데서 더욱 진한 시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중략)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하디 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수채' 부분)

흐려지지만 지워지지 않는 세계. 그는 그것을 ‘번지는 수채(水彩)의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붕어빵집 아주머니와 생선가게 아낙과 퇴근길의 시적 화자는 한결같이 도시 서민이다. 그들의 얼굴이 지상에 없는 빛깔로 물들고 있다. 앉은 자리에서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견뎌야 하는 도시적 밥벌이의 내성. 도시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치욕을 견디는 일에 다름 아니다. 밥줄을 쥐고 있는 도시라는 괴물의 등짝에 저녁노을이 번져들고 있다. 모든 게 붉은 빛에 감겨 묽어지는 풍경에서 시인은 도시인으로서의 일상을 수락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연한 애수를 보여준다. 본래의 색을 흐릿하게 풀어낼 줄 안다는 것. 풀어내서 다른 사물에 스민다는 것. 아주 지우지는 못하지만 슬그머니 색을 놓쳐본다는 것. 우리 생의 내력이란 결국 묽어지고 흐릿해지는 수채의 세계가 아니던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