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4)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입력 2012-06-07 18:18


각지의 택함 받은 자들에 보낸 베드로 편지 역시 마가가 대필한듯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로마 교회는 베드로를 로마 교회의 수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베드로의 행적을 로마와 연관시키려 했고, 베드로 전서를 쓴 곳도 역시 로마라고 해석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벧전 5:12∼13)

로마 교회는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세상 권력을 바벨론으로 비유한 것처럼(계 18:2) 베드로도 로마를 바벨론으로 썼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것은 AD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고,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AD 63년 네로 황제 때였다. 복음이 로마에 들어갈 때부터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

헬라처럼 로마 역시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의 나라였고, 명분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로마에는 로마의 신들 외에도 헬라, 애굽, 소아시아의 여러 신들이 들어와 신들의 백화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로마에 유대의 한 신이 더 들어온다고 하여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고, 유대인의 회당도 허용되었다.

유대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유대의 전통을 잘 모르는 왕이나 총독이 그들의 성전에 신상을 세우려 하여 백성의 반발이 있었을 뿐, 로마가 그들의 신앙 자체를 탄압한 적은 없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로마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총독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눅 23:4) 그는 다만 산헤드린 공회가 그를 반역죄로 고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황제에게 고소하겠다고 위협하여 그를 반역죄로 처형했을 뿐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모든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에도 로마의 박해는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그들을 박해한 세력은 유대인뿐이었고, 사도 바울을 고발한 것도 유대인들이었다. 사도 바울을 심문한 총독 베스도 역시 그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행 25:25)

유대 왕 아그립바 Ⅱ세도 그와 의견이 같았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행 26:32)

AD 61년 바울이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도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일반 가옥에 연금되었으며,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났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행 28:18∼19)

바울은 결국 AD 63년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직후 석방되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핍박하는 로마를 두려워하여 바벨론이라고 써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 AD 64년까지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전혀 없었다.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가 바벨론에서 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

이 서한의 대필자는 AD 50년 경 바벨론을 방문하여 베드로의 구술을 따라 마가복음을 받아 쓴 마가였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벧전 5:12)

그는 바울과 동행했던 그 실라가 아니라 베드로가 자기 서한을 수신 지역에 전달하도록 부탁한 형제였다. 베드로가 바벨론을 터키 동북방과 파르티아 지역의 선교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도성이었고, 유대인의 조상들이 끌려가 노역에 시달렸던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바벨론에 끌려온 조상들이 주저앉아 울었던 그 유브라데 강변에서(시 137:1) 베드로가 불러주는 대로 마가는 그의 편지를 받아쓴 것이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벧전 5:13)

베드로 전서를 쓸 때에 마가 역시 그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헬라어 문장에 능통한 마가가 곁에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서신을 대필시켜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 전서에 나오는 ‘고난’의 주제를 지적하며 그것을 로마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이 ‘여러 가지 시험’은 로마의 큰 화재 이후 도미티아누스에 이르는 혹독한 박해가 아니라 ‘잠깐’ 근심하게 되었던 사건들이다. 그것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세력과 헬라인 세력이 장사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총회에서 있었던 할례 논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핍박과 환난보다 오히려 구원과 순종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그는 또 바울처럼(롬 13:1)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4)

이런 권고는 바울이나 베드로가 만일 도미티아누스의 시대처럼 로마 권력이 그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비록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더라도 선행에 힘쓰면 오히려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그렇게 권고한 것이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믿음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벧전 2:9) 자부심으로 충만해야만 종의 순종을 실천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것은 유대인 특유의 분노와 폭력을 제어하라는 것이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6∼17)

그것이 곧 진리를 지켜나가는 길이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사랑을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바울의 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주로 헬라 쪽 교회의 지도자들이 등장하나 베드로도 역시 동북방의 선교 지역에서 활동하며 그 모든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들을 세웠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지도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