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한명이 죽는 건 서재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입력 2012-06-07 18:16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컬러스 에번스/글항아리

“카야르딜드어는 결코 큰 언어가 아니었다. 아마 절정기에도 화자가 150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82년 내가 팻 가보리를 소개받았을 때 카야르딜드어 화자는 40명도 채 남지 않았으며, 이들은 모두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었다.”(21쪽)

카야르딜트는 호주 퀸즐랜드 주 벤팅크 섬의 원주민이다. 그중 한 명이자 40년 동안 시력을 잃고 살아온 ‘팻 가보리’는 백인식 이름일 뿐, 그의 카야르딜드어 본명은 ‘카바라르징가티 불투쿠’이다. 하지만 카야르딜트 부족들의 후예 가운데 카야르딜드어를 완전히 익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카야르딜드어는 조만간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현장 언어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니컬러스 에번스 호주 국립대 교수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언어의 위기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사라져가는 언어의 증언자들과 직접 생활하며 겪은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번스가 추구하는 ‘현장성’이란 흔히 소수 언어를 어렵게 간직하고 살아갔던 그리고 끝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언어 구사자에 대한 얕은 애도로 귀결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수 언어’ 구사자들이 미개한 문화와 사회 구조를 갖고 있을 것이란 우리들의 편견을 깨뜨리는 동시에 왜 우리가 언어 소멸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에세이 형식으로 써내려간다.

메룬 만다라 지역 질베 마을 주민인 조나스는 마다어를 포함해 8개 언어를 구사한다. 조나스는 어느 날 자기가 결혼하고 싶은 소녀 고고를 찾아가 그녀와 그녀 친구들 앞에서 고백을 했는데, 조나스가 당시 사용한 마다어는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 고고가 쓰던 언어였다. 조나스가 이처럼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 마을과의 소통을 중시하던 부모의 영향이 컸다. 에번스는 이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웃 마을 사람에게 말을 전하는 심부름을 시킨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이를테면 새로운 단어를 외우기 위해 동족어의 관련 지식을 활용하는 등 나이 어린 아이들도 강력한 메타언어적 관심을 키우게 된다.”(49쪽)

이런 맥락에서 그는 사회란 아주 오랜 세대에 걸쳐 인간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환심을 사고, 혹은 누군가를 속이거나 배척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대하고 복잡한 체계를 구축하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언어의 진화는 곧 사회의 진화와 함께한다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언어의 소멸은 사회의 소멸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에번스에 따르면 성서 속 바벨탑 이후 인류는 언어가 많아진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주제넘음을 벌하고 협력과 진보를 막으려는 신의 응징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호주대륙에 첫 발을 디딘 전설 속의 여성 ‘워라무룽운지’의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워라무룽운지는 내륙으로 방향을 잡아 이동하면서, 자식들을 각기 특정 지역에 두고 어느 지역에서 어느 언어를 써야 하는지 선언했다. 워라무룽운지의 신화는 소규모 언어공동체에서 훨씬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 즉 각 사람이 어느 소속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언어가 많은 게 좋은 것이라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41쪽)

파푸아뉴기니 산다운 지방에서 사용되는 옥사프민어의 수(數) 체제는 엄지부터 13단계를 거쳐 14에서 코에 이르고, 다시 반대쪽으로 내려와 27에서 새끼손가락에 이른다. 이 사이클이 끝나면 두 주먹을 들고 “tit fu!”라고 외치는 것이 습관인데 화폐 거래를 위해 영어식 수 체제를 쓰게 되면서 27에 기초한 수 체계는 점점 폐기되고 있다.

뉴기니 고지대는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1930년 호주 탐험가들이 이 지역을 발견했을 때 이들은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들 고산족에게는 이족(異族) 간 결혼의 로맨스를 다룬 운문체 이야기인 ‘톰 야야 캉게’를 쿠와루어로 읊는 암송 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마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처럼 자신의 의식적인 창작력 배후에 있는 뮤즈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뉴기니 고산족에게도 특정 운율을 지닌 시적 언어 체계가 있었던 것이다. 1000행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톰 야야 캉게’는 암송 시인들의 암기와 재창조의 융합을 거쳐 유지돼 왔으나 이제는 그 명맥이 끊어질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언어의 소멸 마지막 국면에 초점을 둔 것이지만 자연재해와 종족 학살을 제외하면 마지막 화자의 탄생과 죽음에 상관없이 한 언어가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개 80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언어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진단하는 크라우스 체계에 따르면 안정 등급(A+)은 언어화자가 100만 명 이상이거나 아이슬란드어처럼 특정 국가의 공식어여야 한다.

언어공동체의 언어가 다른 언어로 바뀌기 시작한 상황이지만 좀 더 고립된 지역에서 아직 그 언어가 유지되고 있다면 A- 등급이다. 그러다 아이들이 해당 언어를 배우는 가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의 연령이 점점 높아진다. 가장 나이 어린 화자가 부모 세대가 되었다가(B등급) 조부모 세대가 되고(C등급), 나중에 증조부모 세대의 몇몇 연로한 화자만 살아남게 된다(D등급). 마침내 마지막 화자가 죽으면 언어는 소멸된다(E등급).

에번스는 “이 책을 쓴 것은 인류의 사고, 즉 6000개에 이르는 언어를 통해 구축되고 전해 내려온 사고의 다양성이 전 세계적으로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전 세계 언어의 수는 10년 안에 50% 정도로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한국어 판’ 서문에 이렇게 지적했다.

“제가 알기로 한국어는 흥미롭고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언어이며 세종대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눈부신 언어 전통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어 자체에만 집중하고 세계의 수많은 언어가 가진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고구려의 언어, 혹은 한때 고구려 영토에 살았던 숙신(肅愼·퉁구스)족의 언어로 기록된 문헌이 있다든가, 이 언어들의 어휘목록이나 문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어땠을까요? 이와 비슷한 아쉬움을 느끼는 곳이 세계에는 많습니다. 다행이라면 현재 우리가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사안에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번스는 아울러 2010년 4월 사라져 가는 언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던 경희대 국문과 김기혁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던 중 이듬해 4월 지병으로 별세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전했다. 김 교수의 후배인 호정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번역을 마무리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