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잎에 앉은 파란 애벌레는 내 동생”… ‘엄마와 털실뭉치’

입력 2012-06-07 18:33


엄마와 털실뭉치/권영상/문학과지성사

“호박 구덩이에/ 뒷거름을 넣고/ 호박씨를 묻었다.// 참 얼마나 기막힌 일인지,// 호박씨는/ 그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푸른 깃발을/ 찾아 들고 나왔다.”(‘호박씨’ 전문)

동시 ‘호박씨’에서 보듯 권영상(59) 시인의 시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전개와 힘찬 반전이 돋보인다. 이 시로 2011년 한국아동문학인협회가 선정한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그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오랜 장맛비에 산의 상처가 사람의 상처 못지않게 큽니다. 그러나 산은 늘 그렇듯 상처를 안고 태연히 장중해지기만 합니다. 참 위대한 것이 자연입니다. ‘호박씨’도 그러한 데가 있습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이처럼 웅숭깊게 그려낼 수 있는 건 그가 순두부로 유명한 강원도 강릉의 초당마을 태생인 것과도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수백 년 된 소나무로 둘러싸인 호숫가 마을의 지순한 풍광은 지금도 뼈와 살이 돼 그의 시에 녹아들고 있다.

“노란 살구가/ 탈싹, 소리 내며 떨어진다./ 집어 들고 보니/ 안됐다, 톡 깨어졌다.// (중략)// 우리도 이쪽 세상으로/ 내려오느라 탈싹, 소리 낸 적 있지./ 응애 응애 응애, 하고.// 그러느라 살구처럼/ 톡, 배꼽이 깨어졌지.”(‘톡 깨어졌다’ 부분)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의 ‘2011 올해의 좋은 동시’로 선정된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의 묘미는 살구와 사람의 동일시에 있다. 낮은 높이의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진 살구와 ‘이쪽 세상으로 내려온’ 갓난아이의 탄생을 대응시켜 그때 나는 소리를 ‘탈싹, 응애’와 그때 생긴 상처를 ‘깨어짐, 배꼽’으로 비유하는 발상이 재미있고 독특하다. 무엇을 주장하거나 목적을 드러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포하는 상징성은 자연을 벗 삼아 뛰놀던 시인의 어린 시절에서 자라 오른 시적인 푸른 싹의 결실이기도 하다.

“쌈을 싸려고/ 배추 한 잎을 손바닥에 얹을 때다./ -나도 지금 식사중이야./ 배추 잎에 앉은/ 파란 애벌레가 내 손을 멈추게 한다./ 그러고 보니 저녁 밥상 앞에/ 엄마, 아빠, 나, 애벌레가 같이 앉아 있다./ -미안해. 너도 많이 먹어./ 새로 생긴 내 동생처럼/ 배추 잎을 내 옆자리에 앉힌다./ 오늘 식구가 늘었다.”(‘미안해, 많이 먹어’ 전문) 서양화가 김중석의 그림이 동심의 빛깔을 더욱 아련하게 채색하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