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종로 (5) 주님의 두가지 선물… 벽돌공장, 아내의 교회 출석
입력 2012-06-07 17:54
1975년 경기도 안양의 이발소 운영을 접고 서울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내가 이발소를 하는 동안 형들은 하나같이 신림동에서 벽돌공장을 차려 기반을 잡고 있었다. 나는 형들의 배려로 잠시 항아리 가게를 하다가 둘째 형의 벽돌공장 현장 책임자를 맡았다. 벽돌공장 일은 이발소 일보다 훨씬 쉬웠다.
그런데 그 일은 의외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거래처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점점 이상한 세계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발소에서는 손님들 머리만 깎아주면 됐지만, 벽돌 공장에선 건축 자재상이나 건축업자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술판과 화투판에 끼어들게 됐다. 그 중 화투판이 문제였다. 술이야 주량에 맞춰 적당히 마실 수 있었지만, 화투판의 매력은 나를 무섭게 빨려들게 했다.
나는 시간만 나면 그들이 벌이는 화투판, 즉 도박판으로 달려갔다. 예전에도 몇 번 ‘짓고땡’이란 걸 해본 적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거기다 나는 타고난 승부근성으로 제법 높은 승률을 유지했다. 얼마 안 지나서 나는 그들로부터 ‘꾼’으로 인정받았다.
내가 서서히 나쁜 습관을 익히는 사이 아내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항아리 가게를 처분한 얼마간의 돈으로 300여 평의 공터를 임대해 벽돌공장을 차린 것이다. 아내는 기술자를 고용해선 시멘트와 모래 섞는 일에서부터 물 뿌리는 일, 심지어 벽돌 싣고 내리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아내의 벽돌공장은 호황을 누렸다. 워낙 정성을 쏟아서인지 아니면 아내 말대로 하나님이 도우셔서인지 벽돌을 찍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아내 차례였다. 신림동으로 이사한 이듬해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아내는 교회에 빠져버렸다고 해야 할 정도로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주일예배에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에다 매일 새벽예배까지 빠지지 않았다. 거기다 벽돌공장 일을 하다가도 교회 일이 생기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다.
나로선 아내가 교회에 열심인 것도 못마땅했지만 더 신경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헌금 문제였다. 아내는 온갖 헌금에다 십일조까지 버는 돈의 거의 절반을 교회에 바치는 듯했다. 물론 자기가 버는 돈으로 자기가 헌금한다고 우기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지만 나는 심히 불만스러웠다.
나는 이에 대해 계속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아내는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다른 부분에서는 웬만하면 내 입장을 수용하는 아내가 교회 문제만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다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내와 언쟁을 하다 홧김에 성경책으로 차려놓은 밥상을 내려쳤는데 밥상이 엎어지면서 성경책은 온통 반찬국물을 뒤집어썼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죽여, 나 죽여! 나도 이렇게 살기 싫어. 그러니 어서 날 죽이란 말이야. 그래 나 교회 안 가. 당신이 날 죽이면 교회 안 가. 아니 교회 못 가. 그러니 어서 날 죽여! 나 죽기 전에는 교회 다니는 거 포기 안 해.…”
잘못 건드렸다 싶었다. 기질 상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죽기 살기로 덤비니 되레 내가 위축됐다. 그러면서 교회가 그렇게도 좋은가 싶었다. 울부짖는 아내를 보자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짧은 시간에 내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러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남편이란 사람의 존재감이 없었으면 교회 다니는 재미에 빠졌을까 하는 생각으로 정리됐다.
“그만두자. 내가 잘못했다. 당신 맘대로 교회 다니고 헌금도 해. 나는 이제 상관치 않을 테니 당신 맘대로 해.”
나는 지기로 했다. 아니, 져야 했다. 이 싸움에서는 결코 내가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마음 같아선 좀 친절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그런 식으로 백기를 들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