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종로 (4) 열번 찍어 넘어온 주님의 선물 ‘아내 전은경’

입력 2012-06-06 18:12


“전은경이 나와! 똑똑하고 거만한 여자 전은경이 나와 보라구!”

여수 애양원에서 6번의 대수술을 하고도 낫지 않는 다리를 끌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예전 작은 형 이발소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이발소에 취직해 있던 중 그녀를 만나 첫 눈에 반한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나는 결국 그녀가 사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무엇 때문에 잠자는 처녀를 불러내. 남녀가 조심스러운 것도 몰라? 소문나면 어쩔려구…”

같이 사는 할머니가 나와선 꾸중을 하셨다. 하지만 내게는 이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한 말이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내가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아이 할머니도 척보면 몰라요? 전은경이와 결혼할 사이예요. 만난지도 오래됐고요.”

이런 식으로 나는 집요하게 그녀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나의 고백에 미동도 않던 그녀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녀의 처지가 나의 불쌍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모두 잃은 그녀는 철저한 외톨이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그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둘이 합쳐 살림을 차렸다. 쉽게 말해 혼전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허름한 단칸방에 살림살이라고야 수저 두 벌과 냄비 하나,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우리 둘은 서로의 아픔을 서로 잘 알기에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이에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서둘러 동거를 시작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로선 그게 최선의 길이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끌어안고 지내던 우리는 서로를 알면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을 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아내 전은경 권사를 만난 걸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라 여긴다. 인간 말종이었던 나를 사람처럼 만들어준 이가 아내였다.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무던히 고생하고도 아내가 지금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내가 신앙을 갖고서 한참 뒤에서야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동거를 시작한 우리 둘은 빨리 돈을 모아 직접 이발소를 운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1년쯤 뒤에 목표를 달성했다. 경기도 안양시 변두리의 한 이발소를 인수해 황금이발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런데 아내의 일손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아내는 첫 아이를 출산했다. 사내였다. 졸지에 나는 두 배의 일을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골수염이 악화돼 다리가 퉁퉁 부으며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라 하루하루 근근이 버텼다. 아내는 주위에서 주워들은 풍문으로 온갖 처방을 다 했다. 고양이를 고아 먹이기도 하고, 뱀탕을 끓여 먹이기도 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아내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이번엔 딸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을 것 같아 다리가 엉망인 상태에서도 단출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73년 4월 20일이었다.

진통제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버텨나가던 나는 드디어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정신없이 추석 대목을 넘기자마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국립의료원으로 실려가 보름여 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다. 더 이상 이발소를 운영할 재간이 없었다.

만약 그때 내가 신앙을 가졌다면, 아마 하나님을 심하게 원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숙명이려니 하고 살았다. 내 인생을 총괄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또한 일련의 과정이었는데 말이다. 그때도 역시 나는 하나님의 길 위에 서 있었는데 말이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