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종로 (3) 애양원서의 6차례 수술 실패… 그러나 새 세상이
입력 2012-06-05 18:03
고향에서 1년여 동안 머무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이발소를 하다가 군에 입대한 형네 집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발소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도왔다. 이발소는 기술자 일당을 주기에도 빠듯할 정도로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러니 형수나 나나 항상 끼니 때우기가 급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덧 나도 사춘기를 지나 청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다. 나의 마지막 울타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54회 생신 전날 화장실에 흥건히 각혈을 하시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으시면서 가족들에게 숨긴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나는 완전히 미쳤다. 장례차를 온 몸으로 가로막으며 몸부림을 쳤다. 주위에서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면 머리로 장의차를 들이받았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 손이 피범벅이 되도록 벽을 마구 쥐어박았다. 왜 그랬을까? 어머니의 흔적을 그렇게 쳐부숨으로써 어머니까지 빼앗아간 세상을 부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서서히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중심이 없어지자 우리 형제들은 마치 남이라도 된 듯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나도 어디론가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중증 장애인인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먹으면 죽는다는 약을 구해 먹었다. 하지만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나는 우연하게 영등포 사창가로 흘러들었다. 저마다 몸뚱이 하나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거기선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고향이나 집안을 따지지도 않았다. 밤이 되면 술 냄새와 분 냄새가 진동했다. 거기서 잘 나가는 아가씨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켜줄 젊은 남자, 이른바 기둥서방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아직 10대인 나는 칼을 한 자루 구해 다리에 차고서 절룩거리며 다녔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애인에다 악만 남은 나를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길진 않았지만 나는 참으로 위험한 세월을 보냈다.
그런 중 고향에서 사촌누나가 날 찾아왔다. 여수 애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주는데, 내 다리를 맡겨보자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큰형수가 마련해준 돈으로 여수로 내려갔다. 들었던 대로 애양원에서는 무료 수술을 약속했다. 내 수술을 맡은 의사는 나보다 키가 배나 됨직한 미국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 예수 믿을 것을 권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무료로 수술을 받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거기서 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받기도 해서였다.
애양원에서 진행된 수술 과정은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한 극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마취에서부터 수술 이후의 회복과정까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무려 6번의 수술을 받으면서 내 몸과 정신은 있는 대로 황폐해졌다.
하지만 골수염은 끝내 낫지 않았다. 미국 의사까지 나섰으니 이번에는 나을지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망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리는 비록 못 고쳤지만 애양원이라는 곳에서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애양원의 나환자촌은 어쩌면 천형의 유배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느낀 건 그게 아니었다. 몸은 비록 병들었어도 해맑은 영혼을 가진 분들이 서로 위하고 도와주면서 만드는 낙원이었다. 나는 거기서 가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멀리 두고 온 자식이나 손자를 생각하셨는지 몰랐다. 어쨌든 자연스럽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