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독교 순례길'…신앙 선배들의 숨결 되새기며 제주 기독교 부흥의 꿈 꿔 나갔으면

입력 2012-06-05 10:49

[미션라이프] “산티아고는 길이며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서영은 선생이 66세에 유언장까지 써가며 40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썼던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문학동네)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시를 떠난 그의 영혼이 타박타박 가 닿은 곳이 바로 산티아고였다. 거기서 그녀는 순례길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그 화살표가 가리킨 곳에서 자신을 벗어던졌다. 순례길을 마치고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제주도 올레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꿈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올레길을 찾아 걷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 이사장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걷기 위해서 사람들이 올레길을 찾고 있지만 수많은 카미노(순례자)들이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그 성스런 순례의 의미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제주 CBS 주도로 ‘제주 기독교 순례길’이 조성됐다. 이 순례길은 척박한 제주 땅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된 길을 따라 묵상하고 걷는 길이다. 일단 제주시 애월읍 금성교회로부터 한림읍 협재리 협재교회까지의 14.2km의 길이 1차로 조성됐다. 18일에는 CBS 이재천 사장을 비롯, 우근민 제주도지사와 양영근 제주관광공사 사장, 장경동 김학중 목사, 지역 교회 목회자와 주민 등이 참가한 가운데 순례길 개장식을 갖는다.


순례길이 시작되는 금성교회. 1908년 최초의 제주지역 파송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는 제주지역 토착민이자 독립운동가인 조봉호 조사(지금의 전도사)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1923년 초가집 예배당을 갖기 까지 가정집을 오가며 예배를 드렸다. 금성교회는 제주인에 의한 최초의 자생적 교회로 제주출신 첫 목회자인 이도종 목사를 배출했다. 현 금성교회 예배당은 1995년에 신축됐다. 비교적 규모가 컸다. 현재 교인 수는 장년 80여명. 건물내 본당 앞에는 지난 시절동안 금성교회의 아침을 깨웠던 녹슨 교회종이 방문자들을 맞고 있었다. 그 녹슨 종이 긴 세월, 제주에 ‘좋은 소식’을 알렸다고 생각하니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1998년부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태종호(49) 목사는 “제주 기독교의 상징인 금성교회로부터 순례길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태 목사로부터 제주도 기독교 상황을 들었다. 57만여 명의 제주도민 가운데 크리스천 비율은 6%에 불과하다. 2005년 인구 총 조사 당시의 크리스천 인구 7.5%에 비하면 수치가 상당히 감소했다. 교회 수는 400개가 채 되지 않는다. 기독교 불모지가 따로 없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상처가 많은 제주는 아주 배타적인 곳입니다. 제주의 기독교는 그동안 제주도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주지역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번 순례길 조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제주 지역에 기독교를 뿌리내리려 했던 신앙 선배들의 숨결을 되새기며 제주 기독교 부흥의 꿈을 꿔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태 목사의 소망이 담긴 말이다.

거기서 400m를 걸으면 옛 금성교회 예배당을 만난다. 건물 외양만 남았다. 예배당 안에 들어서서 단상 위에 써진 성경구절을 보았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장25절 말씀이다. 일제 강점과 해방 직후의 제주4·3 사건, 한국전쟁 등 무수한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통 받았던 제주민들에게 이 지역 믿음의 선각자들은 부활이요, 생명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리고 싶었을까. 앞으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금성교회 옛 예배당 안에서 기도하며 생명의 주와 결코 끝나지 않는 복음 역사를 다시금 생각할 것이다.

거기서 600m를 걸으면 조봉호 조사가 이기풍 선교사의 제주 입도 1년 전에 주민 몇 사람과 함께 예배를 드렸던 첫 기도처가 나온다. 순례자들은 조 조사와 이도종 목사의 생가를 연이어 방문하게 된다. 조 조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도종 목사는 이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제주지역 첫 목회자가 됐다. 그는 1948년 4·3 사태 당시 공비들에 의해서 순교 당했다. 순교 당시 그는 공비들이 파 놓은 구덩이에 순순히 들어가면서 성경과 찬송가, 회중시계를 땅에 놓으면서 담담히 말했다. “여보게들, 나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가네. 이것은 자네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니 자네들도 예수 믿고 후일 하늘나라에서 만나세.” 구덩이 속에서 두 팔을 들어 기도를 올리는 그의 위로 흙이 뿌려졌다. 그의 생가에서 순례자들은 한국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한 순교의 길, 순례의 길을 가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임일 자각한다. 순례길은 일제시대 신사의 터 위에 세워진 한림교회를 거치고 협재교회에 이른다. 한림교회에서 협재교회 사이의 서해안 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에 기생화산인 비양도가 보인다. 고려 목종 5년째인 1002년 6월에 제주 해역 한가운데에서 해저 화산활동으로 해발 114.7m의 산이 솟아나왔다. 그 신묘막측한 현상을 보고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비양도 탄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네’라는 가스펠송 가사를 떠올려 보았다.

제주 기독교 순례길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협재해수욕장 부근의 협재교회로 일단 끝이 난다. 길을 걸으면서 제주 바닷가의 풍광을 즐기며 해녀들의 활동도 볼 수 있다. 올레길과 겹쳐진 길도 있다. 올레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이 순례길까지 함께 걷는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제주CBS는 앞으로 한경교회, 조수교회, 평화박물관, 이도종 목사 순교지, 대정교회, 강병대교회 등을 거쳐 모슬포교회에 이르는 길을 순차적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조만간 각 유적지 별로 표지판을 세우고 도처에 순례길을 알려주는 물고기 표지(익투스·초기 기독교도들이 비밀스런 상징으로 썼던 두 개의 곡선을 겹쳐 만든 물고기 모양)를 그릴 예정이다.

이번 순례길 조성에는 1년 반 전에 제주에 부임한 민경중 CBS 제주 본부장의 역할이 컸다. CBS의 간판인 노컷뉴스를 처음 기획한 민 본부장은 제주도 교회를 돌아보며 순례길 조성이야말로 제주 기독교 부흥을 위한 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 제주도청 관계자들과 제주관광공사 인사들, 제주내 각 교회 목회자들을 접촉, 설득했다. 이번 개장식을 앞두고 수없이 순례길을 걸었다는 민 본부장은 “제주 순례길이 세속화에 시달리는 한국 기독교에 맑은 영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전하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주 순례길을 걸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제주 순례길은 바다이고,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영혼의 부름을 따라 걷는 모든 이들은 카미노(순례자)다.”

이번 여름 제주 방문을 계획하는 크리스천들은 순례길 따라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 보길 바란다. 자녀들과 함께 걷는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요 더할 나위 없는 교육일 것이다. 특히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한번 그 길을 걷도록 권해 본다. 가던 길 멈추고 십자가의 길, 순종의 길을 걷는 이 시대의 카미노가 되어 보시라(064-748-7400). 제주=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