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호국보훈의 달 6월

입력 2012-06-04 18:28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의 전몰장병 추모명비에 새겨진 글귀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넋을 ‘기억하는 달’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많지만 공동체를 위해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의 희생위에 오늘 우리들이 자랑하고 즐기는 풍요가 이뤄졌어도 치매기가 있는 우리 사회는 그들의 희생을 더 이상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공과 성취, 공동체 성과물의 나눔에는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기회의 공평성을 역설하면서도 공동체를 위한 자신의 역할 나눔에는 인색하며 책임있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6월이 가기 전 부산의 유엔묘지에 참배하며 남을 위한 희생정신을 새겨보라고 말해보고 싶다. 그곳에는 17살의 외국 소년병이 이방 땅에서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고귀한 피를 흘린 흔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흔히 밥상공동체라 말한다. 어느 공동체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조직 문화를 표현할 때 곧잘 “우리가 남이가”를 확인하는 밥상공동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시인 김지하의 말처럼 밥은 하늘이며 서로 나눠먹는 하늘같은 것이기에 그 하늘을 같이 지미고 사는 우리는 하나 라는 의미이리라.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셔 인간의 낙원을 만드는 곳, 바로 밥상공동체이다. 그런데 이 낙원을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과 책임의 분담, 그리고 때때로 희생이 필요하다. 여기에 밥상공동체가 갈등공동체로 나뉘는 분기점이 있다. 서로 책임의 분량과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달 가정의 달을 맞으며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중 하나의 가사에 보면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가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이 찬송을 수도 없이 불렀다.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에 방점을 찍으며. 그런데 이 상을 만드는 데는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 식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었다. 밥이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이브’하게만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기독교교육학자인 제임스 파울러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성인’(成人)이 된다는 것이고 성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우주의 밥상에 희망과 기쁨, 공평함으로 참여하되, 밥이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노동의 분담에 있음을 깨닫고 책임있게 도덕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이 세상에서의 품위라고 역설한다. 이 책임성으로부터의 도피는 어른들의 종교가 아니라 미숙한 어린이와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마약이라 말했는지도 모른다.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기만 즐기려는 일부 종교인들의 무책임성이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마치 마약을 나누는 무책임한 삶의 낙오자들의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원복을 선물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있는 것들을 다스리며 지키게”하셨다. 생육의 책임, 번성의 책임, 온 땅을 공평하게 다스리며 건강하게 지키는 문화와 노동의 신성한 청지기의 책임을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에게 축복으로 선물하셨다. 이 축복을 지킬 뿐 아니라 이 복의 통로가 되어 온 세상에 활짝 퍼지도록 해나가는 삶의 명령.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신성한 책임이고 품격이라 믿는다. 스캇 팩이란 심리학자는 이 품격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마음의 병, 공동체의 병을 앓게 된다고 역설한다. 왜 우리들에게 마음의 병이 창궐하고 있을까? 왜 우리들의 공동체, 밥상공동체는 어디에나 갈등이 차고 넘칠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상을 차려 주겠지, 그 상에 나는 수저만 들고 참여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는 아닐까? 호국 보훈의 달에 우리가 받은 이 고귀한 밥상을 만드신 모든 분들을 사랑과 감사로 가슴에 새기며 기억하고 싶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