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해석의 갈등을 넘어 진리로
입력 2012-06-04 18:23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 리쾨르는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통한 새로운 인간이해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똑같은 사건도 보는 각도와 측면에 따라서 해석과 판단이 다르게 된다. 그러니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을 야기 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진보적인 시각과 보수적인 시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역적 입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사랑의 시각과 정의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입장에서 일면만 보기 때문이다. 현대는 해석의 갈등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왜냐면 갈수록 데카르트가 말한 개인 중심의 코기토(Cogito)사상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교회가 어려운 이유는 다 자기 입장에서만 해석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교계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진정한 연합을 이루지 못한 이유도 해석의 갈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 옳게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적 인간이 부분적으로 판단하고 주장하는 일리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진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 일리와 일리들이 충돌을 함으로써 교회가 몸살을 앓고 만다. 왜 우리는 몸 된 교회 안에서 일리만 주장하며 일리로 싸워야 하는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볼 때 옳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소리에 불과하는데, 왜 그런 징소리와 같은 일리만 고집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일리보다 진리를 따라야 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적어도 그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과 해석, 행동의 모든 기준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정신과 사상에 기초해야 한다. 어떤 사건을 보고 해석해도 언제나 말씀과 성령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해야 한다. 무조건 자신의 입장과 세상적 윤리의 잣대로 잘잘못을 따지고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일리의 노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판단을 잘하고 일처리를 잘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오늘날 사탄이 그 잘난 일리를 가지고 교회를 수라장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다윗 역시 부정적인 면이 있었다. 밧세바 사건뿐만 아니라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유언을 했지 않는가. 그래서 다윗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보셨느냐는 것이다. 다윗의 생전에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얼마나 칭찬해 주셨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주장하는 일리적 판단보다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하나님의 해석을 더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의 근간은 사랑과 용서와 화목임을 알아야 한다. 해석과 일리의 한계를 넘어 진리를 바라보자. 그 진리 안에서 사랑과 용서의 눈물로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며 하나됨의 새 역사를 창조하자.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