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청교도 혁명 이상을 시로 구현한 잃어버린 낙원의 시인 존 밀턴 (中)

입력 2012-06-04 18:23


이혼사유 확대 주장한 책자 공격당하자 사상·표현의 자유 웅변

1640년 영국의 찰스 1세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장기의회를 열자, 의회파는 ‘주교 전쟁’의 배후인 대주교 월리엄 로드부터 탄핵했다. 의회파는 로드를 런던탑에 감금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의회는 찰스 1세의 참수에 앞서 1645년 1월 로드를 참수했다.

대주교 로드는 찰스 1세의 종교 고문이었다. 존 낙스 이래 스코틀랜드에는 장로교회 정치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영국 국교회의 의식과 주교제를 따르게 하기 위해 찰스 1세가 벌인 ‘주교 전쟁’을 부추긴 사람이 대주교 로드였다.

주교제는 영국 국왕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한다. 왕에 의해 임명되는 주교들은 교회의 위계질서를 형성하며 교인들을 지배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며 주교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1637년에 3명의 청교도가 대주교 로드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로드는 성실청(Star Chamber)을 통해 이들을 체포해 귀를 자르고, 잔인하게 고문한 후 투옥시켰다. 이에 격분한 청교도들은 주교제 폐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이 장악한 장기의회는 로드를 구금한 후, 1641년 5월 27일 주교제와 그에 따르는 일체의 것을 철폐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의회에서 주교제 폐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지자 노위치의 주교 조셉 홀은 ‘신권에 의거한 주교제’와 ‘보잘 것 없는 항의’를 발표해 주교제를 옹호하고 나섰다. 청교도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몇 달 뒤 밀턴의 가정교사였던 토머스 영을 포함하여 5명의 청교도가 홀 주교에 반박하는 글 ‘보잘 것 없는 항의에 대한 답변’을 쓰고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그들의 머리글자를 따서 스멕팀누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주교제에 대한 찬반을 두고 약 1년간 팸플릿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신문이나 잡지가 없는 시대였다. 소책자인 팸플릿이 의견이나 주장을 가장 빨리 전달할 수 있는 매체였다. 밀턴도 주교제를 둘러싼 이 팸플릿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스멕팀누스를 위한 반박’을 써서 홀 주교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 팸플릿은 홀 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이자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주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조롱이었다.

이미 그는 1641년 5월에 익명으로 발표한 ‘종교개혁론’에서 주교제도에 반대했다. 요지는 이렇다. ‘구원은 개인의 문제이고, 구원의 원리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성서에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구원은 주교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종교 논의도 개인의 특권이요 의무이지 성직자의 독점물이 아니다. 주교제도는 개인에게 주어진 존엄성을 구속하기에 그 자체로 악이다. 왕에 의해 임명된 주교들은 의식과 예복과 같은 형식만 중시한다. 새로운 주교는 교회 내에서 모든 교인들의 손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고, 기도와 설교에만 전념해야 한다. 팸플릿 전쟁에서 밀턴은 ‘스멕팀누스 변호’ ‘교회치리론’ 등의 글을 연달아 발표해 주교 폐지와 신앙의 자유를 담은 종교개혁을 주장했다.

밀턴이 팸플릿 전쟁을 벌이는 동안, 영국의 정세는 찰스 1세와 의회파 사이의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급변했다. 장기의회는 1641년 7월 악명 높은 성실청과 특별고등재판소를 폐지하였다. 그해 8월에는 의회가 13인의 주교를 탄핵했다. 12월에는 홀을 포함한 10인의 주교를 런던탑에 투옥시켰다. 그해 11월 22일 의회는 즉위 이후 찰스 1세의 실정을 담은 ‘대간의서’를 통과시켰다. 이에 화가 난 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의사당으로 의원들을 체포하러 나섰다. 왕의 분노를 피해 도망간 의회파는 의회군을 결성해 찰스 1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팸플릿 전쟁이 이제 실제 전쟁으로 번진 것이었다.

의회파와 왕당파의 전쟁이 한창인 사이, 1643년 1월에 밀턴은 종교에 관한 문제와 동떨어진 주제인 ‘이혼론’을 발표했다. ‘이혼론’은 교회와 국가가 개인의 결혼과 이혼을 제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밀턴은 왜 왕당파와 의회파의 전투가 고조될 때 ‘이혼론’을 발표한 것일까? ‘이혼론’은 밀턴의 급작스런 결혼과 곧 이은 별거생활과 관련이 있다.

1642년 밀턴은 리처드 파웰에게서 12파운드의 이자를 받기 위해 옥스퍼드셔의 포리스트 힐을 방문했다. 밀턴의 아버지는 밀턴에게 채권을 주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 수입을 받아 살아가도록 했다. 밀턴의 아버지는 연 24파운드를 받기로 하고 포리스트 힐의 치안판사이며 지주인 로버트 파웰에게 300파운드를 빌려 주었다. 파웰은 씀씀이가 헤픈 지주로 집도 저당 잡힌 상태였다. 밀턴은 이자가 오지 않자 이자 지불을 독촉하기 위해 파웰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자 대신 파웰의 장녀 메리 파웰과 결혼하게 된다. 이 때 상황을 밀턴의 조카 에드워드 필립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떠날 때 총각이었던 그가 한 달 뒤 집에 돌아올 때에는 기혼자였다. 그의 아내는 파웰의 장녀인 메리였다.”

결혼은 충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메리 파웰은 17세의 소녀였고, 밀턴은 32세였다. 어린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지만, 이내 밀턴은 그녀와 여러 면에서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나이차도 있었지만, 왕당파 가문의 밝고 발랄한 분위기에서 자란 그녀는 밀턴 집안의 엄격한 청교도 가풍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밀턴도 그녀와의 결혼을 곧 후회했다. 순종적인 아내를 기대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는 밀턴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도 달랐다. 한 사람은 열렬한 왕당파 집안의 딸이었고, 밀턴은 의회파의 열성 분자였다. 결국 그녀는 친가에서 요청이 있자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메리는 한 달 정도 친가에 있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내란이 벌어졌다. 밀턴은 메리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다시 돌아올 것을 독촉했지만, 파웰가는 경멸적인 말로 그 사람을 쫓아 버렸다. 밀턴은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열렬한 왕당파인 아버지 파웰의 뜻인지 아니면 아내 자신의 뜻인지 몰라 괴로워했다.

결혼과 곧 이은 파국은 밀턴으로 하여금 이혼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혼은 불가능했다. 이혼은 의회에서 특별히 허락받거나 배우자의 간통, 성불구, 배교 등 교회법에 명시된 경우에 한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밀턴이 볼 때, 간통과 성불구 등과 같은 육체적인 결함만을 이혼의 사유로 한정하는 교회법은 문제가 있었다.

그는 ‘이혼론’을 써서 배우자와 마음이 맞지 않는 정신적 결함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혼은 영육의 진정한 결합이며, 하나님이 정한 결혼의 일차적 목적은 육체적 결합이 아니라,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 고독을 위무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혼에 대한 밀턴의 생각은 오늘날로 보면 별로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 밀턴의 ‘이혼론’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밀턴은 구교뿐만 아니라 청교도 진영에서도 공격을 당했다.

1644년 8월 14일 장로파 목사 파머는 의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밀턴의 ‘이혼론’을 언급하며, 이혼은 결혼의 유대를 깨고 사회의 기초를 파괴할 우려가 있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출판 허가도 받지 않은 이 위험한 책자를 당장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비난하였다. 보수적인 장로파 교인들은 ‘이혼론’과 같은 책자들이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더욱 철저한 검열을 요구했다. 이미 1643년 6월 14일 장기의회에서는 출판허가법을 제정해 어떤 서적이나 소책자, 그리고 논고도 검열관에게 사전승인 및 허가를 받지 못하면 모두 출판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이 법은 내전의 혼란한 상황에서 별로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의 다수파인 장로파는 ‘이혼론’을 문제 삼아 저자와 출판업자를 심문할 것을 요구했다.

밀턴은 검열제도에 대해 분노했다. 이제 문제는 이혼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 넘어갔다. 그는 ‘이혼론’으로 불거진 검열제도에 반대해 1644년 11월 24일에 ‘아레오파지티카’를 썼다. 부제는 ‘검열을 받지 않는 출판의 자유를 위해 영국 의회에게 한 존 밀턴의 연설’이었다.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형식으로 쓴 ‘아레오파지티카’에서 밀턴은 검열제도를 반대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표현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는 검열제도에 대해 이렇게 질타했다.

“우리가 좋은 책 하나를 파괴한다는 것은 이성 그 자체를 죽이는 것이고 이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 것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