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종로 (2) 골수서 고름 철철… “다리를 잘라야만 합니다”

입력 2012-06-04 18:17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으로 요약된다. 홀로 된 어머니가 밭뙈기 하나 없이 여섯 자식을 키우는 형편이야 오죽하겠는가. 우리 일곱 식구가 믿을 것은 갯벌밖에 없었다. 눈만 뜨면 전 가족이 갯벌로 나가 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걷어왔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머리에 이고 순천 시장에 내다 팔아 보리쌀을 사왔다.

희망이라곤 없는 생활이었다. 아니,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런 중 큰 누님이 동네 청년과 결혼하고, 형들 셋이 서울로 떠났다. 모두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뒤이어 내가 초등학교를 마치고서 우리 전 가족은 서울에서 다시 합쳤다.

세검정을 거쳐 자리를 잡은 신길동. 그곳에는 당시 전국에서 먹고 살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처음 갔을 때 신길동은 논과 민둥산, 공동묘지 등으로 이뤄진 허허벌판이었다. 한겨울에도 자고나면 묏자리 몇 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 사는 집들이 생겨났다. 대책 없는 사람들에게 법이고 뭐고 생각할 계제가 못 되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을지로 입구의 중앙고등공민중학교라는 데를 들어갔다. 중학교에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던 차에 둘째 형이 그렇게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나는 거기조차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어느 날 얼음판에서 넘어진 다음부터 몸에서 열이 나면서 전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여 지났을까, 그나마 힘을 쓰는 왼쪽 다리가 퉁퉁 부으면서 숨도 못 쉴 만큼 아팠다. 급기야 형에게 업혀 영등포시립병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결핵성 골수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결핵균에 의해 골수 속에 고름이 생기는 병으로, 계속 재발하기 때문에 뼛속에 깊이 균이 퍼지기 전에 다리를 자르는 게 상책이라는 의사의 말이었다. 할 수 없이 일주일 후 다리를 절단하기로 예약했다.

꼼짝없이 앉은뱅이가 돼야 했다. 소아마비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었던 건 왼쪽 다리 덕분이었는데, 그걸 자르게 됐으니 말이다. 어린 나이에도 왜 그리 서러운지 일주일 동안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기어코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나는 안 가겠다고 했다. 왼쪽 다리가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자르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왼쪽 다리 무릎 바깥쪽에 박아둔 심지를 빼고 고름을 짜내고 새 심지를 만들어 뼛속에 박아 넣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다. 그런 생활이 1년을 넘어섰다. 움직이지 않고 빈둥거리다 보니 왼쪽 다리가 굳어갔다. 어렵사리 들어간 중학교도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이젠 다리를 자르지 않고도 꼼짝없이 앉은뱅이가 될 신세가 됐다. 겁이 났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 연습부터 했다. 이불을 높이 쌓아놓고 짚고 일어서다 방바닥에 나뒹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벽을 짚고 발걸음을 떼는 연습에 들어갔다. 죽기 살기로 몸부림을 친 끝에 몇 달 뒤 지팡이를 짚고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됐다.

골수염에 걸린 지 2년여 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큰 누님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기보다는 탁 트인 바다라도 바라보며 지내는 게 낫다는 가족들의 의견이었다. 고향에서도 만날 다리에 고름을 짜내는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다 갯낚시에 도전했다. 1m 남짓의 낚싯대에 줄을 매 낚시와 추를 매달아 바닷물에 넣으면 희한하게도 망둥어라는 놈이 걸려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 진리 하나를 터득했다. 큰 놈을 낚기 위해선 큰 미끼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큰 낚시는 한참 뒤 내 나이 서른 넘어서 이뤄졌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게 됐으니 말이다. 세상에서 ‘예수님 잡기’, 즉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 되는 것보다 큰 게 어디에 있겠는가.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