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윤태일] 더빙된 외화를 즐길 권리
입력 2012-06-04 18:29
“외래콘텐츠는 번역 거쳐야 자국문화 자극하고 재창조하는 징검다리 역할에 도움돼”
나이가 들수록 외국영화나 방송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것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지상파 방송에서 외화를 방영할 때는 우리말로 더빙을 해주지만, 극장이나 케이블 방송 등에서는 대부분 자막 처리되기 때문이다. 직업상 책이나 논문 등을 보느라 피로한 눈을 휴식활동에서까지 혹사하고 싶지 않다. 아동용 만화영화처럼 외화도 우리말 자막 버전과 더빙 버전 두 가지로 출시해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다.
외국의 경우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자국의 문화전통에 자부심이 강한 나라는 더빙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처럼 영어권 국가, 상대적으로 신생국가이거나 공식 언어가 여럿인 나라는 어린이용 만화영화 등만 더빙하고 나머지는 자막처리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외국프로그램은 영어 콘텐츠다. 미국의 극장이나 방송에서는 어차피 외국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 미국조차 어떤 경우에는 영국 프로그램을 자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미국식 영어로 더빙해 준다. 캐나다에서도 프랑스어를 쓰는 퀘백주에서는 모든 영어 프로그램을 프랑스어로 더빙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모든 외국 프로그램은 더빙을 원칙으로 하고, 일본은 자막과 더빙을 병행한다.
문화전통이 깊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더빙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우선 정보처리 관점에서 볼 때도 프로그램에 대한 몰입에 유리하다. 제한용량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정보처리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시각정보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는 자막 영화에서는 영상의 아름다움이나 섬세한 연기, 빠른 장면전환, 그리고 액션영화에서 특수효과가 제공하는 화려한 볼거리를 충분히 정보처리하지 못할 수 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자막보다는 더빙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측면이 더 많다. 시각장애인, 교육수준이 낮아 글을 빨리 읽지 못하는 사람들, 가정이나 가게에서 일하면서 흘려보기를 해야 하는 주부나 자영업자들, 해상도가 떨어지는 수상기로 시청하는 사람들, 그리고 노인들에게 자막읽기는 부담이다.
또 기술적으로 더빙이 미디어 환경에 더 부합되는 측면이 있다. 조그만 액정화면으로 시청해야 하는 요즘의 모바일 환경에서 자막처리된 영화는 눈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3D 영화의 등장은 자막읽기를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더빙기술도 발달해 원작의 음향효과는 그대로 보존한 채 외국어 음성 부분만 자국어 음성으로 대체할 수 있다. 심지어 사후 녹음된 음성에 맞도록 입술움직임을 조절하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기술까지 개발되어 자연스러운 더빙이 가능하다.
미학적 측면에서 더빙이 원작을 훼손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원작 텍스트란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존되어야 할 화석이 아니다. 더구나 모든 외래문화는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정한 변형과 굴절을 거칠 수밖에 없다. 자국민의 감수성에 맞도록 나름대로 변형하는 것이 오히려 원작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고 제대로 향유하는 태도일 수 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더빙할 때 자국 문화에 맞는 유머를 구사하거나 성적 농담의 수위를 조절하며, 더빙전문 성우가 원작의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끌기도 한다. 이러한 번역 혹은 번안을 거칠 때, 외국의 콘텐츠가 자국문화를 자극하고 재창조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도 극장용 외화의 더빙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비용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더빙관련 산업을 활성화하는 효과가 클 것이다. 독일에 영화더빙을 전문으로 하는 스튜디오가 40개에 이르고 성우만 2000명이 넘어 더빙산업의 매출이 연 1600억 달러 이상이다.
지금처럼 자막으로 된 외화를 극장에서만 제공할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우리말로 녹음된 외화도 즐길 수 있도록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해주었으면 한다.
윤태일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