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어찌 바람 탓이랴

입력 2012-06-04 18:28


다산의 초년기 시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관조가 주조를 이룬다. 산에서 약초 캐던 늙은이가 배를 부리려니 손이 영 설다. 게다가 바람은 언제나 배를 젓는 반대 방향으로 분다. 사람들을 건너 주려 사공의 마음은 급한데, 일마다 어긋나니 속이 이만저만 불울한 게 아니다. 가만 돌아보면, 그러나 어찌 바람 탓이랴. 부는 바람을 잘 타지 못한 사공 탓이다.

관직에 막 진출했다가 좌절을 겪었던 젊은 날의 고민이 오롯이 담겼다. 바람과 물결에 시달리는 사이 마음만 사나워졌다. 자신이 무얼 하던 사람인지, 무얼 하려던 사람인지조차 잊고 습관처럼 날을 세웠다. 이때 다산은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물결에도 서툴고 바람도 잘 타지 못하면서 현실정치에서 경세제민을 실현하려 애쓰느니, 세상의 병을 진단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약초 늙은이로 늙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과 두량 넓은 학문적 성취를 예견한 운명적 노래이다. 그래서인가. 은둔을 노래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패배한 자아와 타협하는 시도 아니다. ‘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에워쌌네’라고 한 최치원의 시처럼 짙은 자폐적 정서도 없다. 대신, 담담한 성찰의 목소리 속에 자신의 본면목을 찾은 이의 희망이 나직나직 읽힌다.

거친 파랑 위에 표류할 때, 자신도 모르게 마음만 사나와져 파랑 따라 요동칠 때, 잠시 눈을 감자.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본분이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약초 늙은이의 일이 세상을 건네주는 사공의 일보다 값 없지 않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문화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