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사망 年 4만명… 이상일 교수 “환자 안전 문제, 실태 파악→사고 분석→대책 마련 시급”
입력 2012-06-04 18:21
울산의대 예방의학과 이상일(52·사진) 교수가 ‘누구도 혼자만 피해갈 수 없는 환자 안전 문제’란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국민일보에 보내왔다. 그는 최근 ‘국내 병원에서 연간 약 4만명이 의료과오(의료사고)로 죽어 나간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의료사고 추정 보고서를 발표해 파문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 교수는 “한국소비자원 등에 접수된 의료사고 관련 분쟁 건수는 빙산의 일각일 뿐, 드러나지 않는 사건과 사고는 그보다 훨씬 더 많다”며 “불편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실태 파악 노력과 함께 오류개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의 글을 요약해 소개한다.
1994년 11월 14일. 미국의 유방암 환자 벳시 레만(39·여)이 항암제 치료를 받기 위해 하버드대 의대 교육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레만은 적정 용량의 4배에 이르는 항암제 주사를 맞고 그해 12월 3일 사망했다. 명백한 의사의 약 처방 오류에 의한 사고였다.
레만은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의학전문기자였다. 그가 입원한 병원은 세계적인 암 전문병원으로 알려진 ‘다나-파버 암센터’였다. 미국 언론들은 즉각 의료사고에 관심을 갖고 집중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후 3년간 의료사고 관련 사건이 무려 28회나 각 신문의 1면을 장식했을 정도다.
환자로서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될 때 이 같은 위험에 노출된 것은 레만 같은 의학전문기자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의료인들까지 그와 유사한 위험에 빠지고 있었다.
◇과연 환자들은 병원에서 안전하게 지내는가=환자안전문제는 미국의학원이 1999년 ‘사람은 누구나 잘못 할 수 있다(To Err is Human)’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미국의학원은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서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의료사고로 매년 4만4000∼9만8000명의 환자가 사망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최근 병원 내 환자위해사건 발생을 다룬 외국의 체계적 문헌고찰 연구에 따르면 입원 환자가 각종 의료사고를 겪을 확률은 9.2%, 이 중 사망에 이르는 비중은 7.4%였다. 사전에 적절히 대응했을 경우 사망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은 43.5%에 달한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환자안전 수준이 외국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가정 하에 계산한 국내 환자안전문제 발생 규모(추정치)를 지난달 22일 한 토론회에서 제시한 바 있다(본보 5월 24일자 1·3면, 28일자 5면 참조). 우리나라의 2010년 ‘건강보험통계연보’ 입원 건수인 574만4566건에 외국의 조사연구 결과를 대입하면, 연간 약 3만9000명의 입원 환자가 ‘위해사건’으로 사망하고 있으며 이 중 불가항력적 사고를 제외하고 예방 가능했던 사망은 약 1만7000명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예방 가능 사망자는 2010년 사망원인통계연보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인 6830명의 거의 3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이는 사망자 501명이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규모의 인명사고가 열흘마다 한 번씩 계속 터지는 것과 같다.
◇한국은 환자안전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보건복지부는 현재 시행 중인 의료기관 인증제와 의료분쟁조정제도가 환자안전문제 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의료기관 인증제가 환자안전개선에 기여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효과가 ‘자발적으로’ 인증을 받는 일부 의료기관에 국한될 뿐이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환자안전에 취약할 것으로 생각되는 중소규모 의료기관들은 대부분 인증제 참여를 미루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인증을 받은 기관에서조차 심각한 환자안전문제가 발생, 적지 않은 민원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의료분쟁조정제도도 마찬가지다. 이미 발생한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를 사후에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의료사고에 대한 사전 예방대책이 빠진 의료분쟁조정제도는 질병의 원인에 대한 치료는 방치한 채 질병의 증상만을 조절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의료분쟁조정 문턱이 낮아지면서 의료사고로 인한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커진 의료기관들이 더욱 방어 진료를 하거나 의료사고 자체를 감추려고 하는 역기능이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의료진과 환자 모두 손해를 보는 소위 ‘루즈-루즈 게임(loose-loose game)’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실태 파악 급선무… 항공안전보고체계 응용 필요=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료사고 발생 자체를 줄여 의료진과 환자 모두 이득을 보는 ‘윈-윈 게임(win-win game)’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환자안전 분야 전문가들은 사고 발생률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킨 항공분야의 경험을 참고할 것을 권고한다. 항공사고 발생률은 1970년대 200만분의 1 수준에서 최근 1000만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이들은 항공안전보고라는 오류보고체계를 통해 항공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요인들을 사전에 발견, 제거한다. 또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전문가들이 사고를 철저하게 분석, 원인을 규명한다. 아울러 그 결과를 세계 항공업계 전체가 공유함으로써 동일 또는 유사 사고의 재발을 막는 것이다.
의료에도 환자안전을 위해 이런 접근법이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항공분야와 같이 의료기관 또는 의료인이 환자안전문제를 자발적으로 보고하고, 전문가들이 이를 분석해 문제 발생을 막거나 줄이는 방안을 만들어 공유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의료기관 또는 의료인의 오류보고 및 분석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내부고발자의 신원은 물론 이들의 활동과 관련된 문서에 대해 법적으로 보호해주는 제도도 도입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는 적절한 대책을 마련할 수가 없다. 환자안전문제가 얼마나 많이, 또한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한 현황 파악이 시급하다. 전국적인 오류보고체계의 구축 및 경험 공유와 함께 환자안전문제를 전담하는 기구의 지정 또는 신설, 의료인의 환자안전개선 활동에 대한 기술적·재정적 지원 등도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도 개인적 노력으로 진료 중 발생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위험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부는 하루 빨리 환자안전 관련 제도를 정비해 진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위험을 조기에 발견, 제거함으로써 환자들이 좀 더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정리=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