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장로 칼럼] 종교인과 신앙인 (2)

입력 2012-06-04 15:57

평신도가 바라는 목회자상

집안 식구들과 가정예배를 드린 후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함께 예배에 참석한 조카가 뜸을 들이더니 자기자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한마디 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자신이 사귀는 여자 친구가 본인에게 며칠 전 들려준 이야기라고 했다.

여자 친구의 친구가 어느 전도사와 결혼을 했는데, 그 전도사가 명품 옷도 많이 사주고 돈을 아주 펑펑 잘 쓴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전도사가 무슨 돈이 있냐고 했더니 친구가 말하길 전도사와 결혼했지만 전도사 아버지인 시아버님이 알아주는 교회 담임목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주의 종인 전도사가 명품을 사고 돈을 펑펑 쓰는 것이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시집 잘 갔다고 부러움을 사는 것이 더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시아버지 목사님께서 목사안수 받으면 빨리 담임 목사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그게 사실이냐고 다그쳐 물어봤다. 여자 친구가 직접 만나서 들은 것인데 뭐 친구끼리 거짓말하겠느냐는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평신도로서 분노의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찌 그런 목사님이 계실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당시 나는 한 신학대학의 관선 이사장으로 있었기에 바로 그 신학대학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장님, 우리 신학교는 결코 이런 목회자를 배출하지 않지요?”라고 물었다.

총장님도 “참, 어처구니없네요. 안 그러도록 잘 교육해야죠, 이사장님.”라고 했다.

그러나 아주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교인들과 하나님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가정의 운명은 기독교인들에게 달렸고, 기독교인의 운명은 교회와 목사님에게 있고, 목사님의 문제는 신학교 교육 문제라는 생각을 평소에 해왔던 나였다. 그래서 교육은 참으로 중요하고 중요하다.

안타까움에 있다가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주는 일이 생각나 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분은 캐나다 국적의 선교사다. 서울에 살 때 큰 일식집을 경영했다. 큰돈을 벌고 캐나다로 이민 가서 영주권을 받고 큰 음식점을 하다가 어느 날 성령님의 강림으로 평신도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았고 무조건 떠나라는 말씀이셨다고 한다. 이것을 거부하려고 무척 노력했는데 하면 할수록 하던 사업도 안 되어서 문을 닫고 계속 기도만 시키셔서 나중에는 월세 집과 연금 몇 푼만 남기고 재산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 결국 맨 몸으로 캄보디아 라오스로 선교를 떠났고, 몽고에서 자신의 기도로 일어난 치유은사는 본인 스스로도 놀랬다고 한다. 귀신이 나가는 장면과 죽을병이 순식간에 완치되는 경험은 정말 성령의 은사를 맛보는 순간이었다고 하셨다.

나이가 든 몸을 이끌고 두 부부가 이곳저곳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도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아무 돈도 없이 어떻게 선교를 하시는지 정말 성령의 은사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또 한 분이 생각난다.

내가 작년에 우리 회사 공장이 있는 베트남에서 어느 부부가 대기업에 근무하다 현지에 남아 선교를 자비량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자신의 일상을 주님께 의지하고 선교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좋은 추억을 생각하면서 이 참기 어려운 이야기를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어떤 분은 낙도에서, 오지에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가 하면 실망을 시키는 분도 계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기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가는 큰 기업을 하면서 온 정력과 시간을 회사를 위해 사용하고 본인은 정말 검소하게 사는 분도 있지만 어떤 분은 조그만 기업을 하면서 사치와 망종을 일삼는 기업가도 주변에서 많이 발견한다.

나 자신도 어떤지 조용히 반성하는 기회도 가져보았다. 세상일로 근심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길이요, 하나님의 일을 진심으로 근심하면 죄의 문제와 영적 문제 해결을 위해 회개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로 회개해야 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우리의 행동이 주님의 하시는 일에 방해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에 대한 부르심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다.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강덕영 장로/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