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고혜련] 집에서 놀고 있다고?
입력 2012-06-03 18:16
여전히 우아하고 똑 부러진 H의 하소연.
부부 모임에서 남편이 친구 아내에게 H를 소개하면서 “집사람입니다. 집에서 그냥 놀고 있어요” 하더란다. 친구의 전문직 아내가 눈빛으로 H의 하는 일을 묻는 듯하자 남편이 앞질러 한 대답이란다. 남자들이 전업주부인 아내 얘기를 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아내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절망한다. 세상에, 하루 종일 생색도 안 나게 해야 하는 집안일이 얼마나 많은데 놀고 있다니!
“끼니 대령 하루 2회 30년간 2만1900번, 설거지 2만1900번, 집안 청소와 빨래 도합 1만6000번, 양복바지와 셔츠 다림질….” H는 그길로 돌아와 자신이 한 일을 남편에게 휴대전화 문자로 날린 후 말없이 여행을 떠났고 남편은 자신의 실수를 싹싹 빌며 앞으로 설거지를 도맡겠다고 나섰단다. H는 난생 처음 이런 계산을 한 후 그 숫자가 엄청나 자신도 놀랐단다. 그리고는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설움이 밀려와 여행 내내 엉엉 울게 되더란다.
나 역시 그 숫자에 놀랐다. 한 끼 식사를 마련하는 데 시장보기부터 조리, 상차림, 설거지까지 얼마나 번거롭고 힘이 드는데. 거기다 아이들 도시락에 학교 진학에서 입시 준비까지. 한국의 아내들보다 바쁘고 유능한 여성들이 과연 이 지구상에 있을까. 거의 전천후에 전지전능한 해결사 수준이다.
이제 주변에서 그런 배은망덕한 망발을 범하는 남자들을 보면 “참 딱한 사람이네” 하며 그 사람의 전 인격을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은 흔히 “집안 식구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휜다”고 말한다. 아내들은 괜스레 남편 앞에서 죄인인양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특히나 매달 생활비를 받아 쓰는 입장의 친구들은 종종 ‘치사함’을 떨칠 수 없단다. 지나가는 말로, 집에 있으면서도 재테크에 성공한 뉘집 ‘마누라’ 칭찬할 때면 그야말로 세상 살 맛이 안 난단다. 우울증에 잠 못 이루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다.
최근 아내와 사별한 후 일손을 구할 수 없어 스스로 집안일을 책임져야 했던 한 남자 후배는 “아, 정말 집안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며 “아픈 몸으로 그 일을 묵묵히 다 해낸 아내에게 엎드려 사죄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두 자녀의 저녁 독서실 도시락까지 하루 2끼 이상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그는 “고맙다는 말도 해 주지 못한 아내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했다.
오늘부터라도 적어도 아내가 놀고 있다는 말은 하지 마시라. 그리고 “여보, 미처 몰랐어. 당신 정말 수고가 많아. 내가 뭐 도울 일 없을까?” 그러면 아내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할거다. “됐어요, 여보. 고마워요!” 아내들이 가사일로 남편에게 투정할 때 그를 부려먹으려 해서가 아니다. 해도 해도 끝없는 수고를 좀 알아 달라는 절박한 발버둥임을 알자. ‘황혼 이혼’이 갈수록 늘어가는 요즘, 아내 칭찬은 못할망정 깎아내리지는 말라는 얘기다. 배신감보다 더 사람을 골병들게 하는 게 또 있을까.
고혜련(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