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종로 (1) 세살때 찾아온 소아마비와 평생의 고통 골수염

입력 2012-06-03 18:07


“하나님 아버지, 서종로 집사는 20년 이상 결핵성 골수염으로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깨끗이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만 이제 의사가 수술할 때에도 함께 하시고 그 손길을 붙잡아 주시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주옵소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촛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과 섭리하심으로 서 집사의 다리를 말끔히 낫게 해주옵소서.”

1970년대 중반 신림제일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갓 받고 나서의 일이다. 수술을 받기 전 찾아오신 장홍수 목사님이 내 다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수술을 받고 입원실로 돌아와 깨어난 순간 이상한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 편안함이 밀려들면서 마치 꿈을 꾸는 듯 황홀했다. 수술을 받은 게 아니라 어디 천국 같은 곳을 여행하고 온 느낌이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그 뒤에 있었다. 매일 고름이 쏟아지던 다리에서 고름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고름은커녕 물도 나오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끈질기게 괴롭히던 골수염이 사라졌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지져주신 것이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목사님이 기도하실 때 다리가 찌릿찌릿했던 것 같았다. 아내의 말대로 그때 성령의 불이 내 다리뼈 속을 지나갔던 것일까. 말로만 들었던 기적이 내게 일어났단 말인가. 어쨌든 그 길로 나는 죽음과도 같던 골수염에서 해방됐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내 인생을 회고해볼 때 이 말이 너무나 적합하다는 생각을 한다. 참으로 곡절과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한 인생이었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부자유자가 되었고, 이어서 결핵성 골수염에 걸려 거의 인생의 절반을 참담하게 병과 싸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잘못된 남자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도 숱하게 저질렀다.

하지만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서 아내로부터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고, 목사님의 기도로 불치병이었던 골수염도 깨끗이 치유되는 은혜를 경험했다. 그에 이어 많은 축복을 받았다. 사업이 번창해 물질의 축복도 받았고 자녀들의 축복, 건강의 축복, 평화로운 가정의 축복도 받았다. 그러면서 복을 누리는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할 다양한 책임들도 해냈다. 장애인 돕기에서부터 선교와 섬김, 나눔 등을 실천하면서 분에 넘치는 직무들도 맡았다.

나는 1947년 전남 여천군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서 태어났다. 3남 3녀의 막내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난과 시련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그 유명한 여순반란사건의 후유증으로 젖먹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지독한 가난을 벗 삼아야 했다.

내가 세 살 때였다. 잘 놀던 아이가 자고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까운 곳에 병원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갈 형편이 아니어서 양쪽 다리가 마비된 아이를 업고 어머니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았다. 소아마비라는 걸 알게 된 어머니는 1년 넘게 매일 20㎞ 넘게 떨어진 한의원까지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무당집에 이름을 올려놓고 치성을 드렸다.

그러나 내 소아마비는 그런 걸로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다만 앉은뱅이 신세를 면하고 불편하게나마 걸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체장애인으로서 나의 험난한 운명은 시작됐다.

서종로 장로=전남 여천 출생, 지체장애인 2급, 예성 장로부총회장, 예성 전국장로연합회 회장 등 역임, 현 희망선교회, 한국달리다굼장애인선교회, 들소리신문 이사장, 한국성결교연합회 평신도위원장, 성결대학교 이사, 동방주택 대표, 신림제일교회 시무장로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