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17) 불행과 허기와 결핍을 꿰뚫는 상생의 생태학… 시인 최금진
입력 2012-06-01 18:10
가족사의 비극적 내력을 달래는 역설의 시사실과 환영이 뒤섞인 그로테스크 미학
“할머니는 1907년생이었다. 할머니는 저승사자도 탐내지 않는 여든 셋에 자살을 했다. 어쩌다 나는 아버지 없는 집에서 태어나, 어머니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둘러 대책도 없이 어른이 되었을까. 아버지(1940년생)는 내가 세 살 때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서른셋의 나이였다.”
최금진(42) 시인은 산문 ‘나는 후루꾸다’(‘대산문화’ 2010년 봄호)에서 집안의 비극과 불우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가 술을 먹고 뛰어든 강물 근처에 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촌들도 모두 마흔이 되기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대체 이건 무슨 운명의 애꿎은 장난이란 말인가. 친척 가운데 누군가가 그때 그 일을 입에 올릴라치면 모두들 황망한 얼굴로 “어이, 그만 하지”하고 손을 가로 저었다. 최금진도 철이 들면서 그 얘기를 하는 게 얼마나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인지를 알게 됐다. 아니,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게 드리워진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친척들은 괴로워했다.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은/ 왜 둘씩 셋씩 숨죽이고 앉아/ 한국식으로 육회를 먹나/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나/ 손등까지 싹싹 핥아먹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들 어디로 가나/ (중략)/ 귀신들도 국경이 있나, 정부가 있나/ 왜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증조부와 닮았나/ 고향을 한참 떠나왔고. 친척도 이젠 없는데/ 내 가느다란 팔다리마다 최씨들뿐이다”(‘다들 어디로 갔나’ 부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던 중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계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그의 가족사에 대해 우린 할 말을 잃는다. 인간이 현실의 어떤 현상을 수용하고 용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납득과 이해가 필요하다. 최금진은 가족사에 깃든 비극의 장면 하나하나를 ‘시’라는 언어 형식에 담아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죽은 자’ 혹은 ‘산 자’마저도 모두 탯줄로 연결된 가족이다. 그의 가위눌린 꿈에 나타난 환영들은 이 지상에 부재하는 존재들이지만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을’ 만큼 리얼해서 오히려 환영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인 것만 같다. 따지고 보면 부재하는 존재들이 그를 호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최금진 자신이 억울한 넋들을 언어로 호출해 달래고 있는 이 시적인 형식이야말로 그만의 그로테스크한 미학이 아니겠는가. 불행의 내력을 온 몸을 던져 끊어내겠다는 의지야말로 최금진 시의 운명이자 미학이다. 이러한 태도는 시적 훈련의 결과이든, 성숙의 결과이든 그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나올 수 없는 미학일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초저녁잠에서 깨어/ 여기가 어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황망히 운다/ 오래된 그릇은 저절로 금이 가고/ 인간은 거기 담긴 한 국자의 검은 물처럼 쏟아져 대지에 스민다/ 물줄기가 산 아래로 흘러가 마을의 잠을 이루는 저녁/ 미농지처럼 얇은 잠 사이로/ 산수유꽃이 피어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눈을 감고도 환한 구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가/ 내 귀에서 어린 은어떼가 조각조각 꿈을 물어뜯고 있는가/ 누가 내 잠을 석회처럼 하얗게 강물에 풀어내고 있는가/ 발끝까지 환하다, 화안하다”(‘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부분)
시에서 비극적 리얼리즘이 만들어낸 환영이 얼핏얼핏 떠오르고 있다. 이런 그로테스크인 풍경을 시적 촉수로 어루만질 수밖에 없는 그가 이런 비극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게다가 그 비극을 원천으로 해서 어떻게 ‘문학’의 세계로 입문하게 됐는지, 궁금할 정도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