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海’는 왜 ‘일본해’로 둔갑해갔나… ‘고지도의 매력과 유혹’
입력 2012-05-31 18:43
고지도의 매력과 유혹/김혜정/태학사
“한 점의 고지도에는 표시된 세계와 표시되지 않은 세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있다. 또한 그 지도가 그려지고 유통되던 시대와 ‘나’ 사이에도 수백 년의 시간이 놓여 있다. 그러니 고지도를 해석하는 것은 표시된 세계와 표시되지 않은 세계 사이의 갈등을 읽어내는 일이다.”(7쪽)
한국의 대표적 고지도 수장고인 경희대 혜정박물관 김혜정 관장이 고지도의 주술에 걸린 것은 어린 시절이다. 고서점에서 한 점의 고지도를 만났을 때 나비가 꽃에 유혹되듯 그는 지도의 아름다운 색채에 매료됐다. 그러다 점점 철이 들면서 그는 고지도의 침묵에 빨려든다. 빛바랜 종이 위에 긁고 가는 불규칙한 선들. 그 안에 산과 강, 도시와 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으면 종이 위에서 문이 열리고 지도와 ‘나’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지도는 이런 유미적인 차원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영토와 경계 갈등을 푸는 데 결정적인 논거가 되기도 한다.
혜정박물관에 소장된 11∼20세기의 고지도들 가운데는 한·일 영해 분쟁과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매스컴을 타는 국보급 및 보물급도 즐비하다. 서양 지도에서 ‘일본해’ 표기가 등장한 첫 사례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이다. 하지만 ‘코리아 해(Mar Coria/Mare di Corea)’ 표기는 15세기 중반부터 나타난다. 더군다나 조선이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18세기 초부터 100여 년 동안에는 ‘코리아 해’ 표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조용히 힘을 키우며 네덜란드 등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류한 일본에 의해 ‘코리아 해’는 ‘일본해’로 바뀌어갔다. 김 관장은 “그렇게 된 데는 우리 바다와 섬과 영토를 지키기를 포기한 우리 자신의 잘못도 크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동해가 일본해로 불리게 된 것과 관련, 그는 에도 시대 천문학자 시부카와 하루미(1639∼1715)의 ‘천문분야지도(天文分野之圖)’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시부카와의 스승 오카노이 겐테이는 조선통신사의 일원이었던 박안기(1608∼?)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천문분야지도’의 실질적 제작자인 박안기에 대한 자료는 우리 역사는 물론, 그의 문중 기록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즉, 조선이 박안기 같은 인재들을 서얼이라는 이유로 천시하고 그의 업적도 폄훼한 데 반해, 일본은 ‘조선의 서얼’이 전해준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과학기술의 싹을 틔웠다. 이는 17세기를 전후하여 한국과 일본의 과학기술적 우열이 뒤집히는 결과로 이어졌다”(113쪽)
그에 따르면 영토와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는 관리돼야만 한다. 고작 일본이나 중국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피켓을 들다가 곧 수그러드는 정도로는 영토도, 지도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도는 자연환경적 요소뿐 아니라 인구 분포와 산업 흐름, 정치적 투쟁 과정과 과학 발전 과정, 문화 흐름 같은 인문학적 요소가 다 녹아든 총합체이다.
김 관장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집무실에는 어떤 지도가 걸려 있는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