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 아름다운 조율
입력 2012-05-30 18:53
바쁜 5월을 평안히 보내고 그 마무리를 잘하고 계신지요? 5월은 가정의 달이라 하여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정과 관련된 많은 기념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습니다. 초등학생인 어린 두 조카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챙기는 일에서부터 저의 5월은 시작되었습니다. 넉넉치 않은 동생네 살림살이를 빤히 알고 있기에 조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달 전쯤 물어보고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건지, 가격은 적당한 지 조율을 하지요.
참 어렵습니다. 번번이 조카들의 요구는 조카들의 엄마, 즉 제 올케에 의해 좌절당하고 말지요. 해로운 장난감이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쉽게 망가질 것이다 등등 올케가 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분냄이 되지 않고, 억울함이 되지 않는 조율... 아름다운 조율은 참으로 어려운 가 봅니다.
지난 주일에도 아름다운 조율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게 되었습니다. 준영이 외할머니께 맛있는 점심대접을 하기로 마음먹고 준영이 엄마와 함께 우이동에 있는 맛있는 밥집을 찾았습니다. 당귀, 방풍, 취나물 등등 우리 땅에서 나는 귀한 먹거리가 상을 가득 채웠고 약초 물로 지은 돌솥밥 또한 아주 맛있었습니다. 윗층에 있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대추차와 당귀차를 마시며 이야기의 끈을 하나씩 풀었습니다.
준영이 외삼촌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 2년전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아직까지 힘든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병원비와 여러 부대비용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준영이 엄마에게는 부담되고 있습니다. 폐지수거를 해 생활하시는 준영이 외할머니도 병원비를 보태고는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 수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여기 저기 수소문 해보니 나라에서 도움 받는 기초수급권자가 될 자격이 되는 데, 문제는 준영이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작은 집이었습니다. 채 10평이 안 되는 작은 연립인데 처분하자고 운을 띄우기만 해도 준영이 외할머니는 엄청 화를 내시며 싫어하셨습니다. 너무 싫어하셔서 준영이 엄마도, 저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준영이 외삼촌의 치료는 생각만큼 잘 되지 않고 한 달에 한번 동생 얼굴을 보고 온 준영이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녀를 그리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이 마흔에 정신병원 창살아래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야 하는 동생의 맑은 눈동자일 것입니다. 준영이 외삼촌은 인물이 참 좋습니다. 맑고 착한 눈을 가진 준영이 외삼촌의 우울증은 20대 초반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눈치껏 요령도 피우고 적당히 둘러대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살이가 준영이 외삼촌에게는 버거웠습니다. 채곡채곡 마음속에 쌓이기 시작한 답답함과 억울함과 분노들이 물처럼 맑고 빛났던 그의 영혼을 갉아 먹었고 우울증이라는 깊은 병마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삶 깊이 자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십년.
차를 마시며 준영이 외할머니의 손을 간절히 잡고 “어머니,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 날로 나빠지시는 어머니의 건강, 얼마나 더 오래 병원치료를 해야할 지 모르는 어머니의 귀한 아들...이제 그만 집을 팔고 수급권 신청을 해요. 어머니.”
눈가가 붉어지며 준영이 외할머니는 이야기를 털어놓으셨죠. 준영이 엄마 밑으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고, 아이들 셋 데리고 옮겨다니던 월세방.., 연탄가스 사고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큰 아들. 그래서 그분은 연탄가스가 새지 않는 튼튼한 집, 내 집을 갖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래야 먼저 간 아이한테도 얼굴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겁니다. 그런 연유로 집을 처분하는 일이 당신에게는 그토록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몰랐습니다. 준영이 엄마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너무나 아픈 상처라 말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입을 열어 주셔서 감사드렸고, 이제는 그 짐을 삶 바깥으로 내려놓길 바랐습니다.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갖고 있던 준영이엄마도 이를 받아들이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을 수 있길, 그녀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렸습니다.
<서울 미아리 집창촌 입구 ‘건강한 약국’ 약사. 하월곡동 한성교회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