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폭의 산수화 펼쳐 놓은 듯 굽이굽이 절경… ‘남도의 젖줄’ 무안 영산강

입력 2012-05-30 18:23


전남 담양의 용추계곡 용소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담양호에서 덩치를 불린 후 광주, 나주, 무안을 거쳐 목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남도의 젖줄이다. 남도가락을 닮아 구성지게 흐르는 영산강은 산에 가로막히고 절벽에 부딪칠 때마다 안으로 휘고 밖으로 굽어 산수화 같은 절경을 연출한다. 영산강이 무안 땅에서 처음으로 연출하는 산수화는 ‘영산강 8경’ 중 제2경인 느러지.

영산강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남포강 목포강 금강 사호강 곡강 등으로 불린다. 나주와 함평의 경계를 흐르던 영산강은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느러지에 이르러 곡강(曲江)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곡강은 나주를 향해 길게 돌출한 느러지에 가로막혀 S라인을 그린다. ‘느러지’는 물결이 느려진다는 뜻으로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보면 생김새가 한반도 지도를 닮았다.

S라인 영산강을 한눈에 보려면 배뫼마을의 비래봉 산중턱에 위치한 식영정에 올라야 한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의 담양 식영정(息影亭)과 달리 무안의 식영정(息營亭)은 ‘정치가들이 미래를 경영하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정자’라는 뜻. 조선시대에 승문원 우승지를 지낸 임연(1589∼1648)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로 500년이 넘은 팽나무 8그루에 둘러싸여 있다. 팽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영산강의 S라인이 경북 안동 하회마을처럼 유려하다.

느러지에는 동방의 마르코 폴로로 불리는 최부(1454∼1504)의 묘와 사당이 짙은 녹음 속에서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선 성종 때의 문관인 최부는 1487년 제주도에 갔다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중국 저장성(浙江省)으로 갔다. 반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온 최부는 중국 연안의 해로, 기후, 산천, 도로, 풍속, 민요 등을 자세하게 기술한 표해록(漂海錄)을 지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비견되는 표해록의 저자 최부는 안타깝게도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고 영산강은 이를 애도라도 하듯 흐느끼며 흐른다.

영산강은 몽탄대교를 만나 비로소 강폭이 바다처럼 넓어지면서 몽탄강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꿈여울’이라는 뜻의 몽탄(夢灘)은 고려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지명. 강 건너 나주에 진을 친 고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쫓겨 퇴각하던 중 범람한 영산강에 가로막혀 포위당한다. 이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썰물로 물이 빠진 여울(灘)을 건너라는 말을 들은 왕건은 영산강을 건너 무안에서 매복하다 쫓아온 견훤군을 대파한다. 왕건이 견훤군을 대파한 곳이 파군천이고 이 강을 건너는 다리가 현재의 파군교이다.

나주에서 영산강 둑길을 달리던 영산강자전거길은 몽탄대교를 건너 처음으로 무안 땅에 진입한다. 이곳에서 소댕이나루까지 12㎞ 구간은 영산강자전거길이 일직선으로 달리는 곳. 길섶에 뿌리를 내린 찔레꽃과 개망초의 짙은 향기에 취해 페달을 밟다 보면 무논으로 변신한 영화농장 들판이 바다처럼 광활하게 펼쳐진다.

모내기철을 맞아 물대기가 한창인 영화농장 들판은 나주평야에 버금가는 평야지대. 본래 강과 바다가 만나던 갯벌이었으나 일제가 쌀을 침탈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농토로 만들었다. 백련으로 유명한 회산백련지는 이곳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 바둑판처럼 생긴 영화농장 들판이 얼마나 넓은지 모내기를 하기 위해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리고 나면 영산강 수위가 낮아질 정도라고.

영화농장 들판은 계절마다 독특한 풍경화를 그린다. 황금색 들판이 파도타기를 하는 가을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화는 모내기를 앞두고 물을 가득 채운 무논의 아침. 영암 월출산에서 솟은 태양이 영산강을 건너 영화농장 들판을 붉게 채색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로가 허허롭게 날아올라 풍경화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몽탄대교와 소댕이나루 중간쯤의 강심에는 바위 위에 설치된 빨간색 등표가 홀로 영산강을 지키고 있다. 1934년 세워진 몽탄진등표는 영산강을 오르내리는 황포돛배와 증기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일종의 등대. 등표가 설치된 멍수바위에는 애달픈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강 한가운데 섬처럼 솟은 바위에서 굴을 따는 어미를 나룻배로 실어 나르던 멍수라는 아들이 어느 날 술에 취해 제때 모시러 가지 못해 굴 따던 어미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 날마다 강가에 나와 목이 터져라 어미를 부르던 멍수도 결국 어미 곁으로 가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멍수바위로 불렀다고 한다.

애달픈 전설을 뒤로 하고 페달을 가속하면 뚝방길이 끝나는 곳에서 작은 보트 몇 척이 한가롭게 떠 있는 소댕이나루터를 만난다. 강 건너편 영암군 매월리 연동골을 이어주던 나루는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고 착도로 불리는 나루터 하류의 소댕이섬은 옅은 해무 속에서 요염한 자태를 숨기고 있다.

다리가 놓이기 전 영산강에는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소댕이나루터 하류에 위치한 주룡나루터는 무안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 목포를 출항한 황포돛배가 썰물 때 대기하던 곳으로, 주룡나루터 인근의 영산강은 산에 둘러싸여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수심이 깊은 편이다.

영산강변에 위치한 무안의 마을에는 주룡마을을 비롯해 오룡마을, 해룡마을, 복룡마을, 구룡마을 등 ‘용(龍)’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대부분 왕건과 관련된 지명으로 용은 왕을 의미한다. 영산강 하류의 회룡마을은 ‘용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으로 천년이 흐른 후 이곳에 전남도청이 들어서면서 지명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영산강은 목포에서 하굿둑을 만나기 직전 영산강자전거길 쉼터가 위치한 일로읍 망월리에서 마지막으로 비경을 연출한다. 저녁노을에 물든 아름다운 영산호를 뜻하는 영산석조(榮山夕照)는 ‘영산강 8경’ 중 제1경. 호수처럼 잔잔한 영산호가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게 물들고 강바람이 수변에 뿌리를 내린 갈대를 쓰다듬으면 전라도 삼백리를 적시며 달려온 영산강은 깊은 휴식에 들어간다.

무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