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정원교] 시중쉰과 보이보
입력 2012-05-29 18:29
신중국 건설 50주년 국경절(國慶節) 행사가 열린 1999년 10월 1일 천안문(天安門) 성루.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은 그 무렵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와 함께 당내에서 가장 원로로 대접받고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 천윈(陳雲), 펑전(彭眞) 등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당 고위간부는 죽을 때까지 원로로 대우받는다. 집이 제공되고 비서와 승용차가 배치되는 것은 물론 매달 일정액 생활비도 주어진다.
당시 시중쉰은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당 중앙은 1990년부터 그가 광둥성 선전에서 휴양하며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 시중쉰이 국경절 행사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당 중앙에 비상이 걸렸다. 혹시 ‘불미스런 사고’라도 발생할까 걱정했던 탓이다. 이에 특별기를 배정하는가 하면 베이징에 있는 그의 집도 수리했다(시진핑 평전, 지식의 숲).
행사 당일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시중쉰에게 다가가 각별히 안부를 물었다. 시중쉰은 장쩌민의 이름에 빗대 “인민이 곧 강산이고 강산이 곧 인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푸젠성장 대리를 맡고 있던 시진핑이 아버지를 내내 수행하면서 당내 고위층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음은 물론이다.
보이보는 ‘8대 원로’ 중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덩샤오핑과 절친했다. 87년 1월 개혁파였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축출하는 과정이나 천안문 사태 이후 장쩌민을 지도자로 발탁하는 데 있어서도 덩샤오핑을 도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중쉰이 후야오방을 지지하고 천안문 사태 무력진압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것과는 대조된다.
보이보는 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숙청된 뒤 78년 복권됐다. 시중쉰이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62년 숙청됐다 78년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자 복권된 것과 비슷하다. 류즈단사건이란 마오쩌둥(毛澤東) 일파가 ‘류즈단(시중쉰의 전우)’이라는 인물을 그린 장편을 반당(反黨)소설로 몰아 책 출판에 간여한 시중쉰을 제거한 것을 말한다.
국가경제위원회 주임, 부총리를 지내는 등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보이보는 80년대에 반마오(反毛)운동이 한창일 때 ‘마오쩌둥은 진리의 탐구자’ 등 4편의 문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시라이가 좌파적 행보를 보인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시중쉰과 보이보는 자녀 교육에서 특히 비교가 된다. 시진핑의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누나가 입었던 옷이나 붉은 색 헝겊 꽃신을 신었다. 시진핑이 아이들이 놀린다는 이유로 꽃신을 안 신으려 하자 먹물로 검게 물들인 뒤 신도록 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보이보의 자녀들은 손목시계, 수입 자전거, 반도체 라디오 등을 갖고 있을 만큼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이러한 가풍이 시진핑과 보시라이의 성격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즉 시진핑은 겸허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보시라이는 일을 크게 벌이며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린 데는 이러한 배경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지난 24일은 시중쉰이 사망한 지 10주기 되는 날이었다. 광명일보(光明日報) 인터넷 사이트는 당일 “시중쉰은 평생 남을 해치지 않았다”고 기렸다. 시진핑과 보시라이를 보면서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시진핑이 중국 대륙을 이끌고 가는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
베이징=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