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청교도 혁명 이상을 시로 구현한 잃어버린 낙원의 시인 존 밀턴 (上)

입력 2012-05-28 18:21


크롬웰 비서관·청교도혁명 이론가로 활동… 명저 ‘실락원’ 남겨

찰스 1세가 처형되자 그를 동정하는 분위기가 일어났다. 왕을 미워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처형은 너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왕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찰스 1세를 무지한 대중에 의해 처형된 순교자로 여겼다.

그가 죽은 지 열흘이 지난, 1649년 2월 9일에 ‘왕의 성상’(Eikonbasilike)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왕의 성상’을 죽은 왕이 썼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책의 내용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은 찰스 1세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교회 담임목사였던 존 고든이 쓴 것이었다. 그는 찰스 1세가 위대한 성자이며 무지한 대중이 그를 처형하여 순교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공화국을 막 출범시킨 올리버 크롬웰 측에서는 이 책의 등장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왕당파의 공세를 막기 위한 조치가 뭔가 필요했다. 크롬웰 측에서 ‘왕의 성상’에 반대하는 책을 그해 10월에 펴냈다. 책의 제목은 절묘하게도 ‘우상파괴자’(Eikonoklates)였다. 에이콘( Eikon)이라는 희랍어는 성상과 우상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책은 제목에서부터 ‘왕의 성상’이라는 제목을 비틀어 왕은 성상이 아니라 우상이며, 그래서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명시해 놓고 있었다. 이 절묘한 제목의 책을 쓴 사람은 찰스가 거룩한 순교자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 파괴자로서 처형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이미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당했을 때, ‘왕들과 위정자들의 자격 조건’이라는 정치논설을 써서 국왕의 처형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만일 행정장관이 폭군이나 사악한 왕을 책망하고 그 왕에게 정당한 유죄판결을 내린 뒤 그를 폐위시켜 사형에 처하기를 게을리 해왔다거나 또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여 왔다면, 그러한 일을 누구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며, 어느 시대에서나 합법적인 일로 주장되어 왔다.”

왕을 처단할 수 있다는 이런 과감한 주장을 한 사람은 올리버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었다. 그는 공화국이 수립된 직후인 1649년 3월부터 비서관 역할을 했다. 비서관으로 활동하면서 그가 발표한 정치논설 때문에 그는 일약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정치가로서보다 ‘실락원’이라는 불후의 작품을 쓴 위대한 영국 시인으로서 더 큰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밀턴은 청교도 혁명에 동참하면서 열망했던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접었다. 대신 청교도 혁명의 이론가로서 신생공화국의 프로파간다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연유로 청교도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일까? 밀턴은 1608년 12월 9일 청교도 신앙을 지닌 런던의 한 부유한 대금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밀턴이 청교도가 된 데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 존 밀턴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밀턴은 어렸을 때, 자기 방에서 몰래 성경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다. 화가 난 아버지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그를 집에서 쫓아냈다. 집에서 쫓겨난 아버지 밀턴은 개신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금업자의 일을 돕다가 경험을 쌓아 대부업으로 성공을 하게 된다. 아버지 밀턴은 대부업뿐만 아니라 시와 음악에도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스무 편이 넘는 곡을 만들어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간간이 시를 쓰기도 했다.

아버지 밀턴의 재능은 아들 존 밀턴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아들 밀턴은 어릴 때부터 청교도 교육을 받았다. 밀턴이 다닌 교회는 올 할로우 교회였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는 청교도인 리처드 스톡이었다. 이 교회에서 밀턴은 세례와 교리문답을 받았다. 부유한 아버지 덕택에 밀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문법학교 가운데 하나인 세인트 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다. 가정교사에게는 근대 외국어를 따로 교육받았다. 매우 부지런한 학생인 그는 밤 12시 또는 새벽 1시가 될 때까지 독서를 했다. 밀턴은 말년에 이때 한 과도한 독서로 실명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밀턴은 162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밀턴은 입학 첫 해에 담임교수와 충돌하여 1년 정학을 받았다. 정학 생활을 그는 유배 생활로 표현하며 독서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담임교수를 만나 1629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632년에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정상적으로 졸업했다. 처음에 대학에서 그는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만다.

나중에 밀턴은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죽어버린 교회’와 감독제의 지배를 받는 교회에서 ‘노예 생활’을 하기 싫어 성직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시에 대한 헌신 때문에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대학을 졸업할 때 밀턴은 청교도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반대로 영국 국교회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졌다. 밀턴은 성직자가 되는 대신 시인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 그는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와 같은 유명한 단편 시들을 썼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호르톤과 버크셔에서 6년 동안 머무르면서 대학에서 배우지 못한 교양 교육을 보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철학, 고전문학, 역사, 과학 및 음악 등을 폭 넓게 공부하면서 자신의 교양 세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 기간에 그는 귀족 후원자를 위한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1632)를, 그리고 또 다른 가면극 ‘코머스’(1634)를 썼다. 1637년에 그가 쓴 ‘리시다스’라는 작품에는 돈벌이 목사를 비난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래서 이 작품을 사실상 밀턴의 청교도 입장 선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638년부터 이듬해 7월까지 밀턴은 여행을 통해 모자란 지식을 보충하고 견문을 넓히고자 하인 1명을 데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파리에서는 당시 유명한 신 라틴 시인이자 법학자인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등을 만났다. 이후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방문해 많은 지식층 인사들과 교유했다. 특히 그는 피렌체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에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피렌체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천문학자 갈릴레이를 방문했다. 그때 갈릴레이는 그의 우주관이 로마 교회의 교리와 상충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그는 원래 시칠리아와 그리스를 여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영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여행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 시기에 찰스 1세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월리엄 로드를 임명해 비국교도들을 한창 탄압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도 장로교회를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를 채택할 것을 요구했지만 반란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는 두 번이나 스코틀랜드 진압에 나섰지만 모두 패배했다. 출정에 드는 막대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찰스 1세는 11년간이나 소집하지 않았던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와 충돌만 빚었다. 급기야 국왕 찰스 1세는 청교도가 다수인 의회파를 힘으로 제압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내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밀턴은 1639년 7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열정적으로 정치 세계에 뛰어들었다.

1641년에 그는 ‘영국 교회계율의 개혁에 대하여’라는 글을 써서 영국 국교회의 감독제도와 주교들을 공격하며 새롭고 광범위한 종교개혁에 대한 전망을 밝혔다. 1642년에는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를 써서 이상적 교회 정치는 감독제가 아니라 사도 시대와 같이 단순히 민주적이며 순수성을 보유한 장로 제도라고 주장했다. 밀턴은 정치논설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갈망했던 시인의 명성보다 정치적 활동가로서의 명성을 먼저 얻었다.

밀턴은 청교도 혁명 이후 인생 중반기라 할 수 있는 1660년까지 시인으로서는 폐업상태였다. 그가 그렇게 열망했던 불멸의 시인이 되고자 하던 갈망을 접어 두고 ‘소음과 격렬한 논쟁의 거친 바다로 떠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정치적 출세욕구 때문이었을까? 그는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에서 정치 참여가 자신에게는 상당한 희생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