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장진호 전투

입력 2012-05-27 18:13

장진호는 개마고원을 흘러 압록강에 합류하는 장진강을 1934년 댐으로 막아 형성된 인공호수다. 이곳에 고인 물은 황초령을 뚫은 24㎞의 수로터널을 통해 동해 쪽으로 물줄기가 틀어져 발전에 사용된다. 여기서 생산된 전기는 흥남 원산 등 북한 동해안 공업지대는 물론 평양과 서울로도 송전됐다. 장진호는 절경으로 유명해 정기유람선이 운항되기도 했다.

1950년 겨울 이곳에서는 미국 해병 1사단과 중국 제9병단의 7개 사단 사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의 기세를 몰아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던 미군이 중공군에 포위돼 간신히 후퇴한 전투였다. 그해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된 전투에서 미군 1029명이 죽고 4894명이 실종됐으며, 4582명이 부상했다. 중공군은 교전 과정에서 1만9202명이 죽거나 다쳤고, 동상 등으로 인한 비전투 인명피해가 2만8954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장진호 전투는 2차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이어 세계 2대 동계전투로 꼽힌다. 미군 전사에서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도 기록돼 있다. 당시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해병 1사단은 미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17명의 미군 장병이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은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20만 명의 흥남철수를 가능케 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전사자를 챙기는 미국 정부의 노력은 더 눈물겹다. 정전협정 직후인 54년 7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된 이른바 ‘영광의 작전’에서 미국은 4167명의 미군 유해를 1만3528명의 북한 및 중공군 유해와 맞교환했다. 이후에도 북한과 유해 발굴 및 송환 협상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 당시에도 미 해병대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부상자와 시신을 회수하는 전통을 지키느라 가외의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미 보훈청은 1997년 장진호 전투 참전자 단체 ‘Chosin Few’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래 보훈 대상이 아니었던 동상후유 피해자 4000명에게 보상을 허가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카투사 12명의 유해가 지난 25일 우리나라에 송환됐다. 미국이 북한과 공동발굴한 유해 가운데 일부를 넘겨받은 것이다. 다민족 국가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개인에 대해 끝까지 책무를 다하는 것이 국가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 사정이 꼭 같지는 않지만 우리로서도 부러운 미덕임에는 틀림없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