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징용자 배상 판결 이후] “67년 만에 승소 너무 기뻐… 대법 판결은 하나님의 뜻”

입력 2012-05-25 21:34


‘강제 징용’ 89세 여운택 할아버지의 회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마침내 승소한 여운택(89) 할아버지는 25일 서울 암사동 자택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여러 차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주여, 주여”라고 되뇌었다. 아직 승소 판결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흥분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여 할아버지는 “재판에 진 적이 수없이 많다보니 ‘이번에도 지겠지’라고 생각하고 대법원에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겼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던지 그동안 맺혔던 서러움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나무지게만을 메고 평생을 보내기 싫어 간이학교에서 글자를 배운 그는 1940년 평양 한복판에서 일본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벽보를 보고 일본행을 택했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품고 현해탄을 건넌 20세 청년을 기다리던 것은 노예생활과 다름없는 14시간의 강제노동이었다.

“오사카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오전 4시에 깨우더니 몸만들기를 위해 10리길을 뛰게 했어요. 뛰지 않으면 아침밥도 주지 않았지요.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바로 공장으로 내몰았어요.” 여 할아버지는 70여년 전의 일을 정확한 날짜까지 언급하며 엊그제 일처럼 자세하게 증언했다. 특히 신일본제철 공장에서 중노동하며 지낸 하루하루가 생사를 오가는 위기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할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루는 크레인 안에서 일본인 조종수가 작동을 잘못하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어요. 하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양손에 잡은 것이 구리 스위치와 쇠봉이라 감전이 돼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나를 이후에도 쓰시려고 살려주셨던 것 같아요.”

공장 내 일본인 감독들은 한국인을 철저하게 차별했다. 노동자 기숙사에서 절도사건이 나면 한국인을 복도에 일렬로 세워 범인이 나올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일본어를 못하거나 일이 서투르면 폭력이 이어졌다. 한국인은 좁은 기숙사방에서 서로 의지하며 향수를 달래야 했다.

여 할아버지가 강제노동을 했던 1943∼45년은 일본의 전황이 크게 기운 시기였다. 미국의 폭격으로 신일본제철 공장이 대부분 파괴돼 귀국한 여 할아버지는 함북 청진공장에서 해방을 맞았다. 조만간 미지급 임금을 보내주겠다는 회사의 말만 믿고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내려갔지만 신일본제철은 67년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여 할아버지는 “일본 측 대응도 속상하지만 우리 정부의 미온적 대응에 더 화가 난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재판을 시작하자고 먼저 이야기한 쪽도 일본의 양심 있는 변호사들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딸 영희(54)씨도 “이런 소송은 노인들이 나설 게 아니라 정부에서 앞장서야 했다”며 아쉬운 감정을 털어놓았다.

인터뷰 중 여 할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능숙한 일본어로 전화를 받은 여 할아버지는 전화한 사람이 일본 내 재판을 도운 나카다 미쓰노부 변호사라고 했다.

“축하한다고 전화 온 거예요. 재판에서 이겼으니 나를 불러서 잔치를 열 모양입니다.” 여 할아버지는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무관심했던 한국 정부와 자신의 일처럼 챙겨주던 일본 시민단체가 너무나 대조적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홍혁의 기자 hyukeu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