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패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도현 열번째 시집 ‘북항’
입력 2012-05-25 18:14
다시 어둠에서 시작한 시인이 있다. 안도현(51·사진). 시력 28년에 이른 그가 4년 만에 펴낸 열 번째 시집 ‘북항’(문학동네) 수록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부분)
4년이라는 암중모색의 시간 동안 그가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한 세월은 족히 1년이 넘는다. 그의 말대로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한’ 세월인 것이다. 시인의 명성을 고려할 때 언어를 다 소진했던 탓은 아닐 텐데 왜 그는 등단 이후 가장 긴 공백의 시간을 보냈을까. 시집에 해답이 있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일기’ 부분)
1년을 놀고 쓴 첫 시가 ‘일기’이다. 아무리 팍팍한 세월이라 할지라도 시인이 놀지 않으면 누가 논단 말인가. 놀아야 국화 눈썹도, 사슴벌레도, 감나무 그늘도 여여하게 보이는 법이다. 앞의 시 구절인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와 뒤의 시 구절인 ‘그렇다고 해서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는 자기 안의 ‘어둠’에서 다시 ‘중요한 것들’을 재발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말하는 ‘중요한 것들’이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달라진 건 무엇일까. 예전엔 중요한 것들에 동그라미 치고 밑줄 그으며 중요하다고 부각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그냥 물에 띄워놓고만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중략)/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북항’ 부분)
인생의 패배까지도 북항에 매어져 있는 소형 선박들처럼 스스럼없이 물에 띄워놓을 수 있는 성찰의 빛이 63편의 시에 넘치도록 담겨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