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영기 (10)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정맥류 치료 전문의’

입력 2012-05-24 18:20


혈관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는 성형외과 의사가 하지정맥류 치료를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상식에 맞지 않는 길을 17년째 계속 가고 있다. 그것도 보무당당히 힘차게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길이기에 기쁨과 행복으로 가고 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나는 내 진료실을 찾아와 다리에 튀어나온 혈관을 주사로 없애달라는 한 아주머니로 인해 정맥류를 공부하고 다루기 시작했다. 미용성형에 회의감을 품고 다른 길을 열어달라는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정맥류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별한 증상이나 통증이 없기 때문에 궤양이 생기거나 아주 보기 흉하게 혈관이 튀어나와야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해도 재발률이 높을뿐더러 흉터가 크게 남았다. 따라서 정맥류 환자를 상대로 미용적인 치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성형외과 전문의인 내가 정맥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멋진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맥류는 판막의 고장으로 피가 아래로 쏠려 다리 정맥이 튀어나오는 질병이다. 오래 되면 다리가 썩기도 하고, 피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여러 합병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형외과 의사인 나는 미용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다리의 보기흉한 혈관 때문에 평생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하는 여인, 가족들 앞에서조차 다리 내놓기를 꺼리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깨끗한 다리를 돌려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정맥류 치료에 대한 관심은 비수술 치료법에서 시작됐다. 그때 알게 된 게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행해지던 혈관경화요법이었다. 내가 처음 독일로 날아가 지켜본 에두아르두스 클랑켄하우스의 릴 교수 팀의 시술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사로 튀어나온 혈관을 마술처럼 없애주는 장면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입원해서 전신마취로 수술을 진행하는 국내의 시술과 비교할 때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내가 당장 그 시술법을 배우고자 달려들자 릴 교수는 처음엔 ‘노 생큐’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 결국 릴 교수는 조금씩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혈관경화요법에서부터 정맥류 진단법, 혈관검사법, 일반 수술법 등을 차례로 배우면서 나는 마치 신대륙을 찾아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열정적으로 배움에 임하자 릴 교수도 자신의 비법을 있는 대로 다 보여줬다. 일주일에 사흘은 한국에서 진료하고 사흘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면서도 조금도 힘들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인도하시는군요. 저의 유치하고 저급한 기도에도 이렇게 응답해주시는군요. 하나님,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높여드리도록 이렇게 이끄시는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솔직히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서서히 정맥류 전문가로 돼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내 속에선 이런 기도가 나왔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 잠깐 깨어도 그랬다.

미용성형과 정맥류 치료를 병행하다 1995년이 저물 무렵 비로소 나는 변신을 시도했다. 정맥류 전문 의사로서의 자신감을 갖고 국내 처음으로 정맥류 전문 개인의원으로 탈바꿈했다. 특수 혈류진단 설비인 도플러, PPG, 듀플렉스 흑백 초음파, 미국 어큐손 컬러 초음파 등을 구비했다. 독일의 큰 병원 설비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정확한 진단이 선행돼야 치료 후 재발률이 낮다는 것을 독일에서 배웠기에 조금도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가는데 조금의 허점이나 차질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