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그곳은 대안 담론의 창조 공간… ‘변방을 찾아서’
입력 2012-05-24 18:16
변방을 찾아서/신영복/돌베개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전남 해남 땅끝마을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였다. 교실엔 ‘꿈을 담는 도서관’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땅끝마을은 이름 그대로 변방이었다. 2007년 서울 목동아파트 단지에 이웃해 살던 오숙희 박사가 서정분교 도서관 현판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했고, 개관 후 답례로 감사 편지와 함께 고구마 두 상자를 보내왔다.
현판 글씨는 예부터 값을 후하게 치는 게 통례이지만 해남 산 고구마 두 상자에서 풍겨오는 흙냄새는 변방을 일종의 대안 담론의 창조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에게는 뜻밖의 위안이 됐다. “변방은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로 인식된다. 당연히 낙후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약자와 마이너리티에 대한 온정주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변방을 낙후하고 소멸해 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로 읽어냄으로써 변방의 의미를 역전시키는 일이 과제가 될 것이다.”(40쪽)
신 교수는 이른바 ‘신영복 한글 서체’로 알려진 자신의 현판 글씨가 대부분 변방에 걸려 있다는 점에 착안해 해남 땅끝마을을 시작으로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충북 제천의 ‘박달재’, 충북 괴산의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 전북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와 김개남 장군 추모비, 서울특별시 시장실, 그리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석이 있는 경남 봉하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곳을 답사한다. 하지만 현판이나 비문 글씨를 써준다고 해서 그 설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1998년 건립된 벽초 홍명희 문학비에 얽힌 이야기다.
“세 군데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평생 민족을 위해’라는 구절에서 ‘평생’을 빼라. 그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선생’이란 말을 빼라. 그것도 좋습니다. 그 다음엔 ‘전범(戰犯)’이란 말을 넣으라고 했는데 그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두 곳을 고치고 동판을 다시 만들어 부착했습니다.”(81쪽)
당시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이었던 도종환 시인이 현장을 찾은 신 교수에게 들려준 비화이다. 충북 괴산이 고향인 벽초는 북한으로 가면서 농지 17만평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음에도 보훈단체 회원들은 현충일 날 태극기와 망치를 들고 와서 문학비 해설문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벽초는 이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태어나고 1919년 3·1만세 시위를 준비했던 생가도 지금은 선친 이름을 딴 ‘홍범식 고가’로 복원돼 있을 뿐, 벽초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그 자체가 여전히 변방인 것이다.
신 교수의 마지막 방문지는 봉하마을이다. 마침 주중임에도 봉하 묘역엔 참배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곳을 돌아 나오며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 멀고 먼 봉하의 작은 비석에서 깨닫는 것은 이 변방의 작은 묘역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결의하는 창조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 사는 세상’과 ‘좋은 정치’와 ‘좋은 대통령’을 공부하는 교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144쪽)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