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용서와 고혈압
입력 2012-05-22 13:54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때까지 소수의 백인 정권이 대다수 흑인 국민들을 통치했습니다. 근 300여년에 걸친 통치기간 동안 가혹한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시됐고 그 기간 동안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고 투옥되었습니다. 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제일 먼저 흑백간의 화합을 위한 기구를 발족시키고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을 맡겼습니다. 그 기구의 이름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였고 위원회의 모토는 ‘forgiveness without forgetting’ 즉, ‘용서하되 망각하지는 않는다’였습니다.
용서함으로써 얻는 혜택
플로리다병원의 딕 티비츠 박사는 용서가 영적으로 뿐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실제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중 혈압과 용서의 상관관계에 주목하여 일군의 고혈압 환자들을 대상으로 용서훈련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에 실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분노에 대해서, 자신의 억울한 사연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신체 반응 및 감정 상태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용서를 실행함으로써 얻는 혜택에 대해서 토론도 했습니다. 8주간의 교육 후 대조군에 비해 용서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들의 혈압수치가 의미있게 낮아졌습니다. 특히 분노 정도가 심했던 고혈압 환자에서 더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상처들에 대응하는 방식이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는 드물지 않습니다. 그 중 용서하지 않는 대응방식, 즉 상처를 곱씹거나 앙심을 품는 일 따위는 부정적인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들어 교감신경체계를 자극하고 혈압을 상승시킨다는 증거는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는 대응방식은 역으로 이런 반응을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가 더 나은 길인 줄은 알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서함으로 과거의 상황이 우리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되뇌입니다. 용서란 꼭 화해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도 들었습니다. 용서함으로 자유로워지는 사람은 용서받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우리라는 사실에 정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변화시키려 애쓰기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규정하는 것이지 타인의 잘못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용서하려 할 때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픈 상처와 원한과 ‘그 분의 진노하심에 맡기지’(롬 12:19) 못하는 조악한 성정이 그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 자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장장 27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만델라는 용서와 대화를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공적으로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용서하되 망각하지는 않겠다는 취지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다시 생각해도 감동적인 기구입니다.
고혈압 모르고 지내신 분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주님이 지셨던 아픈 십자가를 통해 원수된 관계를 화목케(엡 2:16) 하는 용서의 진수를 보여주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말씀합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한 발짝 더 나가 ‘forgiveness with forgetting’(용서하고 기억하지도 않음)을 생각해봅니다. 성경엔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 죄를 아예 기억도 하지 않으리라”(히 8:12)고 기록돼 있습니다. 딕 티비츠 박사의 연구에 비춰보면 하나님은 평생 고혈압이라곤 모르고 지내시는 분일 것입니다.
<대구 동아신경외과 원장·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