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존슨 전기 40년간 쓰는 남자

입력 2012-05-22 18:06


지난 6일자 ‘뉴욕타임스 북리뷰’ 1면에는 이례적으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글이 실렸다. 이달부터 판매에 들어간 한 책에 대한 서평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저자가 매혹적이고 꼼꼼한 기록으로 다시 한번 미국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고 치하했다.

최근 ‘프라하의 겨울’이라는 새 회고록을 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정치학도에게 권하는 두 권 중의 하나로 이 책을 꼽았다. 워싱턴DC와 기자의 집 근처 북부 버지니아의 반즈앤노블 서점에는 이 책을 비롯해 저자의 저작들을 모은 별도 전시공간이 마련됐다. 이 책은 지난 주말 뉴욕타임스 논픽션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 책은 ‘린든 존슨의 시대: 권력의 통로(the passage of power)’이고 저자는 로버트 카로(76)이다. 736쪽이나 되는 이 책이 미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존슨의 전 인생을 다룬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상원의원 존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갈지를 고민하던 1958년부터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듬해인 1964년까지 단 6년간을 다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그가 1976년부터 쓰기 시작한 ‘린든 존슨의 시대’ 전기시리즈의 4번째 권이다. 3권인 ‘상원의 지휘자’가 나온 지 10년 만이고 첫 권 집필에 들어간 지 36년 만이다. 4권을 모두 합치면 3388쪽에 이른다. 앞으로 베트남전 수렁에 빠지는 존슨의 집권 후반기를 다루는 5권이 남아 있어 완간에 40년 이상 걸릴 게 거의 확실하다.

저자 카로가 존슨에 천착한 이유는 정치권력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다. 권력은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획득할 수 있나, 그리고 어떻게 사용되나. 또 권력은 획득한 자와 그 영향권에 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나. 이는 그가 뉴욕 한 일간지의 탐사보도 기자로 일하던 1960년대 초반, 선출된 공직자도 아니었던 유명 도시건축가 로버트 모제스가 막후에서 뉴욕의 도시계획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목격한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존슨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래 정치권력의 속성을 가장 정확히 꿰뚫어 본 대통령이기에 그를 파고들게 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책에서 존슨은 권력을 위해서는 무자비하고 조악하면서도 간계에 능한 정치인이다. 하지만 흑백인종 분리 해소와 빈곤에 대한 전쟁이 대통령이 꼭 해결해야 할 의제라고 판단하고 이를 탁월한 리더십으로 관철하는 ‘거인’이기도 하다. 미 정치시스템의 실제와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도 독서의 소득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마음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은 ‘그러면, 우리나라는…’ 하는 물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연대기적인 서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몇 권을 제외하고 객관적인 전기로 내세울 게 있는지 의문이다. 다른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학계나 출판계의 질과 학문적 엄격성만 문제 삼을 게 아니다. 역대 대통령은 물론 중요한 정책 결정을 내렸던 공직자들도 기록을 남기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10·26 사태 이후의 격동기 10개월간 최고 국정책임자였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결국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정치 기록의 중요성을 강단에서 강조해 온 학자 출신도 다르지 않다. 김영삼 정부 이래 주미대사 등 고위직을 역임한 원로 정치학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의식을 가지고 공직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후배 학자의 권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분(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이 살아 계신데 불편한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