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광화문과 임태영

입력 2012-05-21 18:32

독일명차 메르세데스 벤츠의 신문광고에 광화문이 나온다. ‘S-Class’ 출시를 알리는 문구는 이렇다. “어떤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좌우에 궁장(宮墻, 궁을 둘러싼 성벽)을 길게 거느린 모습에서 역사의 내음을 물씬 풍긴다. 외국차를 광고하기에 광화문을 안성맞춤으로 여긴 것이다. 광고 속에 선명한 ‘光化門’ 편액은 그 자체로 역사의 일부 혹은 오래된 정물로 보였다.

글씨를 쓴 사람은 임태영(1791∼1868)이다. 그의 행적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으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길주목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좌포도대장, 평안도 병마절도사, 금위대장 등을 지낸 전형적인 무관이다. 탄핵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려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지냈다고 한다.

천주교와는 대대로 악연이다. 아버지 임성고가 기해박해 때 천주교도 색출을 주도하더니 아들은 경신박해를 자행했다. 천주교 교세 확산을 못마땅해 하던 좌포도대장 임태영이 1859년 말부터 1860년 8월까지 30여명의 천주교도 체포를 주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방화와 약탈 등 포졸들의 악행이 드러나 그는 파면되고 교우들은 석방됐다.

임태영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종 때다. 고종 2년인 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훈련대장이자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라는 중책을 맡았으니 대원군계 인물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가 광화문 글씨를 썼다는 사실은 2005년 발견된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확인됐다. 이전까지는 유명서화가 정학교(1832∼1914)로 여겨졌으나 이 문헌에서 그가 서사관(書寫官)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이후 2010년 문화재청은 광화문 복원 공사를 마치면서 기존의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대신 임태영의 글씨를 걸었다. 친필은 6·25때 사라지고 없으니 유리 원판에 희미하게 남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글씨의 격이 도마에 오른 것은 원판의 해상도가 워낙 낮은데다 복원과정에 이용된 디지털 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가 찾아낸 그의 친필을 보니 단순한 무관이 아니라 글씨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1856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직후의 간찰(簡札)이고 보면 9년 뒤 경복궁 중건 때는 글씨가 더욱 무르익었을 수도 있겠다. 스타일로 보면 다산 정약용에 가까운 명필이다. 광화문 글씨의 수준을 둘러싼 시비는 접을 때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