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0) 떼제공동체 ④일상의 영성
입력 2012-05-20 18:13
소박·자유… 평범한 일상서 비범한 하나님을 만난다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거룩해질 수는 없을까? 서구 수도원의 역사는 거룩을 위해 현실을 떠나는 역사였다. 3세기의 성 안토니부터 시작하여 6세기의 베네딕트를 거쳐 현대의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은 분리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택해 왔다. 분명 분리는 거룩에 이르게 하는 길 중 하나이다. “가서 네 독방에 앉으라. 네 골방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 사막 교부의 이 말은 분리를 통해 거룩을 찾는 수도원적 거룩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누가 복잡한 현실을 떠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거룩을 찾을 수 있다면, 평범 속에서 비범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떼제가 시도한 것이 그것이다. 어떻게 이집트 사막이나 유다 광야에 가지 않고도 거룩에 이를 수 있을까?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이것이 떼제가 물었던 질문이다. 그래서 떼제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수도원은 아니다. 떼제는 모여서 기도하지만 그렇다고 사막의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지 않는다. 떼제의 이상은,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나 세상과 연합된 공동체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떼제의 이상이다. 이런 눈으로 떼제를 보면 떼제에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많은 거룩의 부스러기들이 있다.
떼제는 일단 전통적인 수도원 형태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삶은 철저한 공동 소유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처음부터 떼제는 자신들을 위해 어떤 기부나 선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토지도 소유하지 않으며 자본도 축적하지 않는다. 떼제 공동체의 회원이 되는 중요한 조건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3∼5년 정도 살아보면 자신이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때 종신 서원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의 규율은 전통적인 수도원 규칙과는 차이가 있다. 공동체 규율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지 사람을 속박하기 위한 법적 조항은 아니다. 떼제는 아무도 붙잡지 않으며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다. 떼제는 마치 옹달샘과 같다. 누구든지 목마르면 와서 갈증을 풀고 가면 된다. 자원봉사가 있지만 그것은 하는 만큼만 하면 되고 힘들면 쉬어도 된다. 어떤 강제규정도 어떤 종파적 규율도 없다. 창설자 로제수사의 말이다. “하나님은 힘센 방법으로 겁을 주어 자신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거룩은 결코 강압으로 되지 않는다.”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드는 것은 규율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다. 강압으로 거룩해지는 방법은 없다. 자유가 규율보다 중요하다. ‘떼제로 가는 길’을 쓴 제이슨 브라이언 산토스는 이 자유를 “침투할 수 있는 경계”라고 불렀다. 그동안의 전통적인 영성운동은 침투할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놓고 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영성은 일상의 영성이 아니라 전문가의 영성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 일반인 특히 젊은이가 갖는 느낌이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 교회 안에는 침투할 수 없는 경계가 너무 많은 것이다. 전통, 혹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규격화되어 있는 숨막히는 부자유 속에서 강요되는 거룩은 자발성도 없고 생명력도 없다. 물론 자유에 한계가 있다. 떼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떼제에서도 알코올을 비롯한 음료수를 팔지만 제한된 곳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팔고 그나마도 제한된 양만 판다. 예배 때도 아무 때나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숙소에도 밤 11시까지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침묵의 정원도 아무 때나 열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이 따르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기만 하면 누구나 풍성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배가 중요하지만 틀에 박힌 하나의 예배 형태는 없다. 찬양-성경봉독-응송-침묵-중보기도-응송-찬양의 전체적인 순서 안에서 자유롭다. 일상의 영성은 신성한 여유에서 나온다. 전문적인 수도사가 되지 않을 사람에게 규격화된 예배, 조금도 예외가 없는 규율, 규칙, 훈련은 영성의 생명을 빼앗아 간다. “신성한 여유란 한계를 침투하는 자유다(산토스).” 우리 교회에도 분명 침투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 그러나 너무 무거운 한계 때문에 사람들이 영성이 아닌 종교성으로 묶여 있지 않은가?
떼제가 보여준 일상의 영성의 생명은 단순성이다. 우선 식사가 단순하다. 아침은 그야말로 작은 빵 한 덩어리와 커피 한 잔이다. 처음에는 사발 하나를 주기에 무언가 했다. 그 사발에 커피, 차, 우유 등을 알아서 타먹으면 된다. 점심, 저녁은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잘 먹는 것은 아니다. 여행하면서 호텔에서 먹는 간단한 한 끼 아침만으로도 떼제에서는 세 끼 식사가 된다. 오후에 간식을 한번 주는데 마시는 음료 하나와 비스킷 하나가 전부다. 수사들이라고 더 잘 먹는 것도 아니다. 없어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있어도 단순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먹는 것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잠자리는 어떤가?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텐트에서 자거나 집단으로 몇 명씩 같이 잔다. 자기 방, 자기 침대가 있는 현대인에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필자는 한국인 신한열 수사의 도움으로 작은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두 평 정도 되는 방에 1,2층으로 된 침대방이다. 아내는 1층에서 자고 나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단순성의 행복이다. 자유 안에서 나누는 교제가 행복을 가져온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든 사람과의 교제든 마찬가지다. 로제가 ‘샘에서 생기를’에서 한 말과 같다. “우리는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 애쓰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과 진실한 기도를 하게 한다. 마더 테레사의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이것도 깊은 자유에서 나오는 일상의 기도다. 떼제의 오후는 성경공부, 노동, 침묵, 찬양배우기, 상담 등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은 우리가 떼제를 가지 않아도 매일 만나는 영적인 메뉴들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교회에 와서 엄숙히 진행하는데 떼제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한다는 것이다.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오후, 콧노래 부르며 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성가대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행복해질까? 우리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거룩은 거룩한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의 임재를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 최고의 영성이다. 떼제가 보여준 이상은 세상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연합되는 일상의 영성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