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제재 비웃는 이란… 선박 게양 국기·선적 등록국 임의 변경해 시리아 석유수출 지원
입력 2012-05-18 19:16
지난 3월 23일 시리아의 타르투스 항. 이란 선박회사 ‘이라노 힌드’ 소속 유조선 ‘엠티 투어’가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의 이물과 고물에는 이란 국기가 아닌 지중해 섬나라 몰타의 국기가 펄럭였다.
이틀을 운항해 25일 시리아 바니아스에 들른 배는 시리아산 원유 12만t(1억 달러 상당)을 싣고 수에즈 운하를 지나 29일 이집트 사이드 항구에 도착한다. 이어 아덴만과 오만만을 지나 4월 14일 호르무즈해협 중간에 있는 이란의 라락이슬란드 항만에 도착, 22일간의 긴 여정을 마친다.
대략적인 운항 과정만 보면 정상적인 유조선의 원유 수송이다. 그러나 운항 내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제해양법을 위반한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8일(현지시간) 서방국가와 유엔 등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시리아를 위해 역시 제재 대상 국가인 이란이 원유수송을 은밀히 돕고 있다고 폭로했다. FT는 선박의 운항기록, 선사 등록상황, 선박 추적자료 등을 종합해 이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며 대표적 사례로 엠티 투어를 꼽았다.
엠티 투어는 게양 국기와 선적 등록국을 임의로 변경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서방국 감시망을 따돌렸다. 우선 이란기업 소유임에도 몰타에 선적을 등록했다. 세금 등의 혜택도 있지만 무엇보다 금수(禁輸)를 피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시리아에서 출항할 때 몰타 국기를 내걸었던 이 배는 몰타 외무부에 의해 금수위반사항이 적발돼 몰타 국기를 게양할 수 없게 되자 운항 중에 급히 볼리비아 국기를 내걸었다. 선박 등록국은 다시 마샬군도로 바꿨다. 선적 소유국과 등록국을 달리할 수 있다는 국제해양법의 ‘편의치적선(便宜置籍船·flags of convenience)’제도를 악용한 것.
볼리비아 해사당국은 엠티 투어가 무단으로 자국 국기를 게양한 데 대해 조사 중이다. 그러나 국제해양법상 제재나 처벌이 미미해 효과는 미지수다. 한 해양법 전문가는 “전 국토가 내륙으로 둘러싸인 볼리비아 같은 경우는 편의치적선 대상 국가에서 아예 제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양전문 로펌 프레쉬필즈 변호사 크리스픽업은 “유럽연합(EU)과 미국, 유엔의 해양규제에 간극이 너무 커 제재효과가 낮을뿐더러 이란은 이런 일을 피하는 데 능수능란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단속이 쉽지 않아 금수조치는 사실상 유명무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리아가 국제사회 감시에도 불구하고 원유 수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경제사정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원유는 시리아 수출의 95%를 차지한다. 수출길이 막히면서 국내총생산(GDP)의 20%가 감소했고, 경제 규모는 최대 10% 이상 축소됐다. 자국 통화는 3분의 1 평가절하됐고 물가는 앙등하는 등 경제위기에 빠지면서 오랜 동맹국인 이란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정진영 기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