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수면 위로 떠오른 과거의 그림자… 권여선 새 장편소설 ‘레가토’
입력 2012-05-18 18:11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은 오정연. 1979년 대학 입학. 한 학기 만에 휴학. 1980년 광주에서 돌연 실종. 그녀는 왜 휴학을 했을까. 고향집에는 왜 갔을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살아 있을까. 오정연의 실종을 둘러싼 이 질문들은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불쑥 튀어나온다. 권여선(47)의 장편 소설 ‘레가토’(창비)에서다.
‘레가토’는 30여 년 전, ‘카타콤’이라 불리던 반 지하 서클룸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인물들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학생운동권 시절 전통연구회 회장이었던 박인하는 지금은 중년의 유명 정치인이 돼 있고, 그 시절 철없던 신입생들은 현재 출판기획사 사장, 국문학과 교수, 국회의원 보좌관 등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실종된 동기 오정연에 대한 기억이 깊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들 앞에 오정연의 동생이라는 하연이 나타나 언니의 흔적을 수소문하면서 그들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은 서로 얽히고 이어지기 시작한다.
박인하에게는 ‘카타콤’ 서클 시절에 오정연을 강제 추행한 기억이 있다. 대학 캠퍼스에서 유인물을 돌리는 ‘피쎄일’을 마치고 술집에 모였을 때, 뜻하지 않게 빚어진 논쟁으로 인해 동기인 용호에게 맞아 입술이 터진 박인하가 만취한 오정연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온 후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 일은 박인하와 79학번 동기들에게 모종의 죄의식을 불러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형질변화를 겪는다. 가해자는 더 이상 가해자만은 아니게 되고 피해자 또한 더 이상 피해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모욕의 관계에서 증오를 품는 쪽은 모욕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모욕을 가하는 쪽이다. 모욕을 감내하는 자의 얼굴은 모욕을 가한 자에게 견딜 수 없이 냉혹한 거울이니. 누군가를 지독히 모욕한 자기 악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니.”(30쪽)
소설에서 오정연은 두 번의 폭력과 마주친다. 첫 번째가 박인하에 의한 개인적인 폭력이라면 두 번째는 광주항쟁 당시 총에 맞아 부상당하는 시대적 폭력이다. 하지만 오정연은 이런 개인적·시대적 폭력의 한 복판을 통과하면서도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 명랑하고 침착한 여성상으로 그려진다.
‘레가토’는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게 하는 단서들을 소설 곳곳에 배치한다. 예를 들면 박인하가 하연을 처음 보았을 때 하연이 입은 ‘흑백 가로줄무늬 셔츠에 하얀 스커트’는 오정연이 실종 직전에 광주에 가면서 입었던 ‘흰 바지에 흑백 가로줄무늬 티셔츠’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가토’의 큰 틀은 멜로드라마적 구조이다.
예컨대 박인하 앞에 나타난 하연은 30여 년 전 오정연이 낳은 자신의 친 딸이라는 통속적 반전이라든지, 오정연은 광주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으며 기억상실증으로 지난 일을 모두 잊은 채 파리에서 그녀의 생명을 구한 프랑스 남자의 사촌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권여선은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효하다”며 “소멸하는 앞의 음과 개시되는 뒤의 음이 겹치는 순간의 화음처럼, 나는 이 소설이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 뭔가를 만들어내는 레가토 독법으로 읽히기를 소망하면서 썼다”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