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의 溫 시네마-단델리온 더스트] 내가 원하는 일이 주님이 원하는 일일까?
입력 2012-05-17 18:23
“조이에게 두 명의 엄마가 있다고 말해주세요. 한 엄마는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내야만 했고, 다른 엄마는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었다고” 기른 부모인 캠벨부부와 낳은 부모인 포터 부부는 그들의 아이 일곱 살 난 사내아이 조이를 서로 데려가려한다. 마치 솔로몬 앞에서 재판 받는 두 여인네처럼.
그러나 영화 ‘단델리온 더스트’에서 캠벨과 포터 부부가 ‘솔로몬의 그녀’들과 다른 점은 두 부모 모두 조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선택과 권리는 서로가 다른 주어진 환경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타당하게 그려진다. 일곱 살의 어린 아이 ‘조이’에게는 선택권이 있을까? 있다면 그 선택권은 누구로부터 부여 받은 것일까?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 베스트 셀러 작가 카렌 킹스베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단델리온 더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두 가정이 서로 견뎌내야 하는 현실의 고난을 지나 구원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중산층 캠벨부부는 그들이 사랑으로 기른 조이를 낳은 부모인 포터 부부에게 내어 주어야만 하는 판결을 법원으로부터 통보받는다. 친모인 웬디는 그녀의 남편 립 포터가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가정폭력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동안 조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입양 보낸다.
7년 후 감옥에서 출소한 립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두 부부가 아이를 위해 가진 환경은 너무 다르다. 캠벨은 조이를 정서적 경제적으로 안정하게 키울 수 있는 반면 포터네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이에 대한 사랑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지지는 않는다. 존 건 감독은 사랑하기 때문에 데려와야만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보낼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진 두 부부의 캐릭터를 아주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설정함으로써 캐릭터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간다. 더욱이 1996년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로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웬디역의 미라 소비노와 립 포터역의 배리 페퍼의 연기는 감독이 부여한 긴장감을 관객과의 정서적인 교감으로 바꿔 놓는다.
‘내가 만일 저 상황이라면 과연 캠벨이 포터보다 조이를 더 잘 키울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반대로 아이를 사랑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인 친부 포터가 조이를 키우는 게 맞는 것일까? 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택한 존 건 감독이 풀어 낸 해법은 놀랍게도 기독교적 구원관이다. 법에 의해서 아이를 뺏겨야만 하는 막다른 처지에 몰린 캠벨 부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려 할 때, 이 일을 알아차린 몰리 캠벨의 언니가 그 것을 막으려 할 때, 목사인 언니의 남편이 부인에게 말한다. “당신이 어떻게 당신이 하려는 일이 주님의 뜻이라고 판단할 수 있지?”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현실적으로 캠벨부부에게 동조할 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이 마무리되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 때, 그것이 진정 주님이 원하는 일인지는 모를 일이다.
’단델리온 더스트‘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민들레 홀씨처럼‘ 정도일 것이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공중에 떠돌아다니다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사람의 인생과 닮아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뿌리를 내려야 되나. 5월 가정의 달을 묵상하게 만드는 영화다.
기독교 복합문화 공간 ‘필름포럼’이 개관한지 한 달을 향해 순항중이다. 이 극장에서 상영하는 기독영화를 보기 위해 저 멀리 전라도 정읍에서 노부부가 하루 일정으로 다녀갔다. 영화를 업으로 시작한 이래 농담처럼 ‘보고 싶은 영화라면 제주도에서도 찾아온다’ 라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그러한 일을 목격한 것은 평생 처음이다. 때로는 한 편의 영화가 예배만큼이나 말씀을 묵상하게 한다.
(서울기독교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