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홍위병
입력 2012-05-16 18:18
중국 베이징의 혁명가 집안 출신인 션판((沈汎)은 1966년 5월 17일 런민일보에 실린 마오쩌둥의 “홍위병에게 명하노니, 곳곳에 숨어있는 적들을 찾아내 처단하라”는 말을 접하고 문화혁명에 가담한다. 12세 때였다. 그는 ‘만리장성 투쟁조’라는 조직을 만들어 책을 불태우고, 교사들에게 린치를 가한다.
그는 수만명의 홍위병이 축구장에 집결해 인민해방군 장성과 베이징 시장을 벌거벗기다시피 해놓고 모욕하는 데 동참한다. 천안문 광장에 마오쩌둥이 나타나자 숱한 홍위병이 기절하는 집단최면의 현장을 목도한다. 베이징대병원 외과의사에게 숨긴 재산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며 메스로 배를 가르고 간장과 고춧가루 물을 붓는 일도 경험한다.
2년 간 홍위병 생활을 하던 그는 권력다툼에서 밀려 샤팡(下放)을 떠난다. 산시(陜西)성 오지에서 농부로 4년을, 옌안(延安)에서 공장노동자로 6년을 지내면서 그는 민초들의 건강한 삶을 통해 의식이 성숙하며 문혁의 미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84년 유학길에 올라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2004년 문혁의 기억을 기록한 ‘Gang of One:Memoirs of a Red Guard’를 출간했다. 국내에는 ‘홍위병-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이란 이름으로 번역됐다. 책 말미에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뒤 ‘더 이상 혁명가 흉내를 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고, 난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고 적었다.
문혁은 봉건잔재 타파와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권력투쟁이었다.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며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이 실용파들을 제압하기 위해 청소년과 대학생들을 동원한 것이다. 마오쩌둥을 신격화한 청년들은 전위대를 자처했고, 혁명 분위기에 매몰돼 친부모를 고발하고 죽이는 일을 저질렀다. 문혁은 중국 현대사를 수십년 후퇴시켰다. 중국 공산당도 마오쩌둥 사후 문혁을 극좌적 오류였다고 평가했다.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지난 12일 발생한 폭력 사태에 청년들이 주역으로 등장했다. 대학 운동권 조직과 연계가 있는 통진당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젊은이들의 순수성과 열정을 악용한 게 사실이라면 죄악이다. 젊은이들도 홍위병의 비극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비이성적 집단행동이 진보를 수십년 후퇴시킬 수도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