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좁은 산등성이’ 현자, 나와 너를 말하다… ‘마르틴 부버’
입력 2012-05-15 21:20
마르틴 부버/박홍규 지음/홍성사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전 생애와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이 있다. 헤르만 헤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면서 “현존하는 보기 드문 현인(賢人)”이라 불렀다는 마르틴 부버(1878∼1965·오스트리아 출신 종교철학자). 그는 시대의 위기를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워 돌파하려 한 마르크스주의나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한 실존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을 걸었다. 그가 꿈꾼 ‘나와 너’의 대화 유토피아는 ‘개인과 집단 어디에도 환원할 수 없는, 그 둘의 절충도 아닌 제3의 길’이다.
‘내 친구 빈센트’‘자유인 루쉰’ 등 인물 연구서를 꾸준히 저술해 온 박홍규 교수의 이 새 책에는 일평생 ‘산등성이’ 위에서 제3의 길을 고독하게 추구한 부버의 삶과 시대, 사상의 궤적이 담겨 있다. 책은 부버의 생애에 따른 주요한 만남과 사상의 형성 과정 등을 쓰레그물(저인망·底引網)로 훑듯이 촘촘히 살피는 한편, 당대 유럽 지성계의 미시적 풍경들을 복원하고 부버의 인간관계 그물을 직조해낸다. 아울러 유대인들의 당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내용은 ‘새롭게 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장면들’처럼 다가온다.
부버의 생애가 아내 파울라와의 사랑이나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우정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운 만남으로만 이어진 건 아니었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버리고 영원히 집을 나간다. 그의 맏아들은 나중 공산주의자가 되어 아버지를 배반한다. 친구들은 나치스로, 혁명가로, 전쟁주의자 등으로 변해 그에게 등을 돌린다. 개인사뿐이랴. 시대의 ‘좁은 산등성이’ 위에서 뚜벅뚜벅 자기 앞의 소로(小路)를 따라 걷는다. ‘좁은 산등성이’란 표현은 부버의 책 ‘랍비 나흐만의 이야기’(1906)에 나오는데 이는 그의 삶을 상징한다. “‘좁은 산등성이’란 인간 존재를 은유한 것으로, 인간은 좌우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비틀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예컨대 그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꿈꾼 시오니스트(Zionist)였음에도,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탄압하는 배타적 시오니즘(Zionism)에는 반대한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 공존과 새로운 사회주의 공동체를 꿈꾼 그의 주장은 이스라엘 주류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나와 너’의 시오니즘을 꿈꾸며 공존과 상호 이해를 위해 투쟁한 그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구리온(David Ben-Gurion)과 끊임없이 충돌한 건 당연해 보인다. 히틀러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스에 대항하여 싸웠고, 자본주의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도 반대했으며, 2차 대전 후에는 ‘냉전’과 ‘핵’에 맞서면서 미국과 소련 간의 ‘나와 너’ 대화를 주장했다.
십대 시절에 만난 ‘나와 너’를 통해 부버와의 대화를 이어 온 저자가 수차례 완독했음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한 범위 안에서만 ‘나와 너’를 풀어주는 대목은 (‘나와 너’를 이미 읽은)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비교 독서를 제공한다.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부버는 ‘나와 그것’은 허구이기 때문에 버리고, ‘나와 너’만 참이기 때문에 이것을 취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부버는 말한다. ‘그것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지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에 속한 우리에게, 사회 갈등 비용이 연간 300조에 달한다는 극단의 갈등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만남의 삶, 좌도 우도 아닌 ‘나와 너’의 대화를 평생 설파하고 실천한 부버에게 이르는 길은 아득하게만 보인다. 그래서다. 마르틴 부버가 반가운 건.
옥명호 (북 칼럼니스트·잉클링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