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주님의 숲

입력 2012-05-15 11:19


이 시절, 동네는 온통 아카시아 향으로 뒤덮입니다. 뒷문을 나서면 나지막한 산으로 연결되는 흙길 너머 숲 속에 양봉 할아버지의 노란색 벌통이 보입니다. 양팔을 펼치고 깊숙이 들이쉬는 달콤한 공기는 한사발의 보약보다 더 윤택하게 나를 살찌웁니다. 구릉을 넘으면 갑자기 나무는 성글어지고 질척한 늪지대가 펼쳐지다 다시 빽빽한 나무 사이 오솔길로 변하는 몽환적인 장소가 있습니다.

눈과 마음을 씻어주는 신록

마치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가 숲의 여신을 만나던 로스로리엔 숲 어귀 같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아카시아 꽃들은 요정 갈라드리엘이 프로도에게 선물한 에아렌딜의 별빛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도 없는 작은 계곡에 다리 난간으로 걸쳐놓은 구부정한 고목은 이 비밀스런 화원에 운치를 더해 줍니다. 새소리들은 맑고 청량해 시냇물 소리에 버금가고 가끔씩 들려오는 탁한 목소리의 꿩 울음소리조차 하나 거슬리지 않습니다. 길섶엔 이팝나무 이파리 같이 하얀 버드나무 꽃가루가 솜털처럼 깔려 때아닌 성탄트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문득 ‘감사해도 감사할 대상이 없다면 얼마나 슬플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푸름과 더불어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을 거니는 오월의 이맘때면 학창 시절 교과서의 ‘신록예찬’이 떠오릅니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볕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숲 속의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풀과 나무와 하늘과 땅을 숨 쉬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숲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우리를 그토록 편안케 하는 걸까요. 과학자들은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Phytoncide)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식물이 세균이나 해충, 곰팡이 등에 저항하려고 내뿜는 물질인 피톤치드는 숲 속 향긋한 아취의 주성분입니다.

일본 니혼 의과대학의 공중보건의학 연구팀은 12명의 성인을 피톤치드 휘발 물질에 저녁 7시부터 아침 8시까지 3일 동안 노출시킨 후 소변과 혈액을 분석했습니다. 2009년에 발표한 그 논문에 따르면 피톤치드 노출 후 암세포에 대항하는 면역세포 중의 하나인 NK세포의 수와 활동성이 현저하게 증가되고 임파구 내의 세포내 항암단백질도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 긴장 상태에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은 뚝 떨어졌고 이런 효과는 1주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신록을 예찬해야 하는 이유를 문학이 아니라 과학으로 뒷받침하는 것 같습니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속으로

우리 주님이 공중 나는 새와 들판의 백합을 보며 하늘 아버지의 손길을 일깨우신 건(마 6:26, 28) 포근하며 안식이 있고 거절을 모르는 숲이 그분을 내심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햇살과 함께 편백나무 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CCM 한 소절 실어 보냅니다. ‘그 어디에도 평화 없네. 참 평화 없네. 그렇지만 당신의 앞에 펼쳐진 주님의 숲에/ 지친 당신이 찾아온다면 숲은 두 팔을 벌려, 그렇게도 힘들어했던 당신의 지친 어깨가/ 이젠 쉬도록 편히 쉬도록, 여기 주님의 숲에’

<대구 동아신경외과 원장·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