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영기 (3) 아내의 전도, 그리고 미래를 예비하시는 하나님

입력 2012-05-15 18:29


군에서 제대한 1987년 나는 다시 국립의료원으로 들어갔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후배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전문의로 양성하는 입장이 된 나는 오히려 더 바빠졌다. 그런 가운데서 “술 마시고 놀 줄 모르는 의사는 일도 잘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구호를 외쳐가며 향락을 즐겼다.

그때 서울 신촌에서 소아과의원을 개원한 아내는 나의 이런 행태에 불평을 표하면서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소신 있게’ 나갔다. 아내는 꾸준히 새벽기도를 나가면서 한 성경공부모임에도 참여했다. 아내가 나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선 가끔 양심에 찔릴 때도 있었다.

그런 만큼 나는 더 교활해져야 했다. 주일에 아내가 교회에 가자고 할까봐 토요일이면 일부러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서 널브러지거나 주일에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교회에 간 뒤 텅 빈 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법까지도 터득했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두어 차례 교회에 나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교회는 내 체질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교회에 가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교회에 갔다 오는 날이면 괜히 투덜대다가 아내와 다투기 일쑤였다.

그런 중에 굳게 닫혀 있던 내 마음의 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아내가 운영하는 소아과의원 간호사들의 변화였다. 개원 초만 하더라도 늘 유행가를 틀어놓고 산만하게 근무하던 그들이 아내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성실해지고 밝아진 것이다. 그러면서 나만 보면 “선생님도 예수님 믿어보세요.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차에 나는 스웨덴 웁살라대학으로 연수를 떠나게 됐다. 어느 누구든 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 집과 가족이 그립지 않겠는가. 한데 가끔씩 보내오는 아내의 편지에는 온통 교회와 관련한 내용들이었다. 아내의 성가대 활동에서부터 아이들의 교회학교 소식, 목사님과 성도들의 동정 등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내의 지극한 정성에 내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는 듯했다. ‘그래, 이제 웬만하면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나가고 신앙생활을 시작해야지.’

그런데 스웨덴에서 연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현지 의사들이 성형외과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하지정맥류 주사 치료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땐 무심코 넘겼지만 하나님께서는 훗날 내게 정맥류를 다루게 하실 암시를 주신 것이었다. 참으로 절묘하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나는 스웨덴에 이어 일본 도쿄의 기타사토 대학병원 연수까지 마친 뒤 1990년 귀국했다. 그런데 스웨덴에서 조금씩 움직이던 내 마음은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한국에 돌아오면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리라 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를 권하면 온갖 핑계를 대거나 때로는 ‘하나님은 없다’며 오히려 아내를 설득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구제불능이었던 것 같다. 급기야 아내에 대한 반감으로 이상한 짓까지 했다. 서울시내 한 유명한 철학관에서 명리학 사주팔자 관상학 궁합 택일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부정하고픈 악한 내 모습이었다. 한데 그 또한 하나님의 인도였을까. 그런 걸 배우면서 오히려 그 허구성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무슨 날을 피해라, 어느 쪽은 좋지 않다는 식으로 매사를 운명론으로 규정짓는가 하면 막연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우리 집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