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파일] 분만사고와 분쟁조정
입력 2012-05-14 17:50
내년부터 시행되는 의료분쟁조정법의 산과 무과실보상 제도를 두고 말이 많다. 의사 잘못이 분명할 때는 의사가 책임을 지는 게 옳다. 그러나 잘못한 일이 없을 때도, 분쟁 중재(해결)를 위해 30%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산부인과 의사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기 신생아 사망률은 2008년 기준 1000명당 1.3명이다. 백분율로 약 0.1% 정도이니 그렇게 높은 비율은 아니다. 더욱이 이들 사망 사고의 대부분은 의사가 최선을 다하고도 원인을 알 수 없고, 원인을 안다고 해도 막을 수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경우이다.
몇 년 전 이렇게 희박한 확률의 불가항력적 사고가 필자가 운영하는 병원에서도 발생했다. 당시 보호자는 분만 중 아이를 잃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최선을 다해 분만을 도운 필자 역시 정확한 원인을 밝혀 해명할 수 없었으니 답답하긴 마찬가지 노릇이었다.
산과 영역의 무과실보상 제도는 이럴 때 양측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풀어주는 의료분쟁조정법의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를 신속·공정하게 구제하고 보건의료인의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한다’는 본래 입법 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다.
현행 의료분쟁조정법은 운영 상 환자가 감정 후 조정 단계에서 언제든지 중재를 중단(불응)하고 소송으로 전환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불가항력적’이라는 판단을 의료분쟁중재원의 감정부에서 다수결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사실 환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운영 형태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의료비 낭비와 산과 의료의 왜곡 현상을 더욱 가속시킬 우려가 높다.
첫째, 산부인과 의사들은 중재·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방어 진료에 더욱 매달리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비(非)의료인이 과반수를 점유하는 감정부에서 산부인과 개원 의사가 ‘불가항력적인 사고였다’란 심결을 받으려면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검사를 모두 시행하는 게 유리하다. 만약의 분쟁 발생에 대비, 아주 희박한 불가항력적 사고(?) 가능성까지 고려해 자신을 최대한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산부인과 의사의 부족 현상이 더욱 악화돼 분만 취약지에 근무할 산부인과 의사를 구하기가 한층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매년 250명가량 배출되던 산부인과 전문의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올해의 경우 불과 90명에 머물렀고, 이 수는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셋째, 산부인과 개원의의 고(高)위험 산모 진료기피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 상대적으로 의료사고 발생 위험이 높은 탓이다. 이로 인해 산모들은 경제적 부담과 불편을 감수하고 원거리의 대도시 산과 병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오상윤 예진산부인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