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디에

입력 2012-05-14 18:08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7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소유권을 국가에 기증한 조용훈(67)씨와 이를 훔쳐 은닉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배모(49)씨. 두 사람 모두 상주본이 자신의 집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창제 의의를 밝힌 예의(例義)뿐 아니라 자모의 쓰임새를 설명한 해례(解例)가 함께 들어있는 판본을 말한다.

상주본은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 사는 골동상인 배씨가 국보 지정 신청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국보 80호이자 세계기록유산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보존상태가 좋고 소리와 표기에 관한 당대 연구자의 주석이 달려 관심을 끌었다. 배씨는 당시 자신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 짐을 옮기던 중 해례본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국보 지정 신청 소식을 접한 조씨는 배씨가 다른 책을 사면서 자신의 집에 있던 해례본을 가져갔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지난해 6월 “배씨가 조씨의 집에서 가져간 사실이 인정된다”며 “배씨는 조씨에게 해례본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배씨는 해례본을 돌려주지 않았고, 은닉처에 대해서도 함구로 일관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소유권자인 조씨는 기증식에서 “문화재청의 잇단 요청으로 기증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1999년 경북 안동의 한 사찰 복장유물을 훔친 서모씨가 당시 법정에서 “해례본을 500만원 받고 조씨에게 넘겼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서씨에게 받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반면 수감 중인 배씨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훔친 것이 아니다. 돌려줄 생각이 없다”며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지난 10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한 항소심 공판에서 재판부가 해례본이 실물 없이 국가에 기증됐다는 언론 보도를 언급하며 은닉된 장소를 공개할 의사가 없는지 묻자 배씨는 “뭐라고요?”라고만 되물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해례본이 낱장으로 뜯긴 채 진공 포장돼 모처에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위원이 감정을 위해 2008년 배씨의 집을 찾았을 때 배씨가 낱장으로 뜯긴 2장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해외에 유출됐다는 설도 없지 않다. 문화재청은 조씨와 배씨의 소유권 싸움이 벌어지고 해례본이 사라진 지 3년이 지난 뒤에야 세관에 밀반출 주의 공문을 보냈다.

문화재청은 조씨의 기증을 계기로 배씨가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글쎄다. 배씨가 “문화재청이 일을 잘못 처리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조씨에게는 절대 돌려줄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조씨와 배씨가 서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여서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응어리를 푸는 게 문제 해결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같은 지역에 사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같은 골동품업자인 만큼 서로를 잘 아는 것은 분명하다. 국보급 문화재를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1조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워낙 값어치가 높은 유물이다 보니 두 사람 다 선뜻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도 있지 않은가. 조씨가 소유권을 국가에 기증했으니 이제 배씨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은닉 장소를 밝힐 차례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간송본과 상주본이 나란히 전시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