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영기 (2) 하나님의 구원작전 “믿음 깊은 아내와 결혼하라”

입력 2012-05-14 18:29


내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성장하고 살았으니 거의 서울 사람이다. 어릴 때 나는 공부도 곧잘 하면서 가끔 엉뚱한 짓을 저지르곤 했다. 경동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칠 때 낙제 수준까지 갔다가 방학 동안 오기를 품고 공부해 단숨에 전교 1등까지 차지한 기억이 있다.

내가 부모님께 처음으로 한 효도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일찌감치 목표를 정해놓고 입시 준비를 했던 터라 이것저것 눈치 볼 필요 없이 무난히 합격했다. 하지만 의예과와 본과를 마치고 졸업할 즈음 전문의 과를 선택하면서는 고민을 좀 했다. 그러다 예술과 의학이 접목된 성형외과가 내 적성에 맞을 것 같아 택했다.

대학을 마치고는 공채로 국립의료원 성형외과에 들어가 인턴 생활을 했다. 1명의 자리에 13명의 지원자가 몰려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운 좋게 합격했다. 대부분 의사들이 그렇겠지만 국립의료원에서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를 하면서 무척 힘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각종 재건수술에 매달렸다. 특히 8시간 이상 걸리는 대수술을 많이 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꿈에 그리던 미용성형을 열심히 하겠다고 여겼던 건 순전한 오산이었다. 그때는 그게 불만이었는데 훗날 그게 소중한 자산이 됐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어쨌든 당시 과중한 업무에 쌓이는 건 스트레스였다. 밤늦게 수술을 마치면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병원 앞 선술집으로 달려가 술을 퍼마셨다. 그리곤 당직실로 들어와 자고 다음 날 수술 일정을 소화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땐 자부심이 대단했다.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며 항상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됐다. 친척의 소개로 만난 같은 대학교 1년 후배인 아내 최세희 권사를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이었다. 당시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진행됐다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아내는 나와 결혼할 때 이미 깊은 신앙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결혼 후 내가 일과 세상적인 재미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아내는 밤마다 나의 변화를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걸핏하면 “하나님은 무슨 얼어 죽을 하나님이야” “교회는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사기집단이야” 등의 악의에 찬 폭언까지 퍼부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작전이라고 확신한다.

국립의료원에서 5년 동안 수련 생활을 거친 1984년 나는 전문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서 4년 동안 군의관 생활을 했다. 전방에서 1년 정도 근무하면서 각 초소를 돌며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한 덕분에 지휘관과 병사들로부터 호평과 인기를 얻었다. 만약 그때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의료봉사와 함께 복음도 전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전방 근무 뒤 서울로 전출돼 함께 근무했던 한 선배 군의관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일반외과 전문의인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과 절제된 생활로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진료실에 ‘의사가 될 것인가, 선교사가 될 것인가’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은 글귀는 훗날 내 인생관과 신앙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가끔 율법의 틀에 갇혀 입술로만 경건을 말하고 모양으로만 거룩함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아닌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나오는 세리의 마음을 묵상한다.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친 그 마음 말이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