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풍경 그 속에서 ‘무언의 풍경’이 솟아오르다… 김태호 작가 개인전
입력 2012-05-13 18:32
아무것도 없는 풍경. 자신의 작업을 ‘드로잉(drawing)’으로 규정하는 김태호(59·서울여대 교수) 작가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형태가 없다. 단지 색채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한참 동안 보고 있으면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무언의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색면 속에는 나무와 숲이 숨어 있기도 하고, 한석봉체 글씨를 붓으로 그린 문자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서울대 회화과를 나와 프랑스 파리 제8대학에서 조형미술학부 석사과정을 밟은 작가는 20년 이상 형태가 거의 없는 드로잉 작업에 몰두해왔다. 그는 그리는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드로잉이라고 강조한다. 현재진행형 ‘ing’가 붙은 드로잉은 작업의 모든 진행과정을 일컫는데, 결과도 중요하지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개인전이 두 곳의 전시장에서 나란히 열린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02-720-5114)에서 6월 3일까지 대형 회화와 설치 및 사진 작품이 전시되고, 100m쯤 떨어진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02-745-1722)에서 6월 10일까지 드로잉과 소품 회화 중심의 작품이 선보인다. 한 작가의 개인전이 미술관과 상업 화랑에서 동시에 열리는 것은 외국에서는 자주 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드물다.
금호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벽면에는 대형 그림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나무판으로 만든 관람로가 조성돼 있다. 관람로 양쪽에는 검은 거울이 깔려 있어 그림이 마치 물속에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옆 전시장에는 바닥을 하얀색으로 꾸며 상반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또 바닥의 빛에 따라 색채가 다르게 보인다.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숲을 찍은 사진과 경기도 파주 공동묘원을 촬영한 사진도 있다. 작가는 찍고 인화하는 작업도 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진이 아니라 드로잉이라고 명명한다. 그러고 보니 한 폭의 수묵 드로잉 같다. 중고 가구들을 바닥 가운데 배치하고 벽면에 작품을 건 전시장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푹 쉬면서 그림을 감상하라고 권한다.
학고재 갤러리 전시장에는 靜(정) 端(단) 등 글씨가 어렴풋이 드러나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밑칠을 하고 그 위에 검은 혹은 흰 물감으로 글씨를 쓴 뒤 적게는 50번, 많게는 100번 정도 덧칠을 한 작품이다. 1호 크기의 깜찍한 드로잉 소품도 곳곳에 걸려 있다. 작가는 “큰 그림도 있고 작은 그림도 있어야 전시가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의도를 설명했다. 소파를 그린 드로잉은 형태가 있는 작품이다. 소파 가운데 사람이 누워 있는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서 쉬고 싶은 작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scape drawing’. 작가는 이런 어려운 제목 대신 ‘멍 때리는 전시’로 하고 싶었다고. 그는 “다들 힘들게 사는데 눈에 힘 빼고 자유롭게 관람하면서 작은 위안이라도 얻는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